“가끔 네가 멈칫할 때가 있었어. 그때마다 그런 느낌을 받은 거야? 누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 뭐 그런 거.”
“맞아. 몇 번 있었어. 네 앞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
“…정말 철없는 소린데 진짜 철없는 소리야. 무식하다고 해도 좋아. 모르니까. 그래서 일단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그냥 속 편한 소리 좀 한번 할게.”
“뭐든 말해. 네가 이야기하는 거면 화 안 내.”
“그런 이야기 하지 말고, 일단…. 그… 그냥 그 사람들에게 네 유전자인지 뭔지 좀 떼 주면 안 돼? 정자나 피나… 그… 죽고 다치는 것보단 낫지 않아?”
“그게 뭐 그렇게 앞에 이상한 수식어를 붙일 이야기야. 누구나 다 그렇게 한 번쯤은 생각해.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그러더라. 그렇게 수상하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네 유전자를 제대로 된 일에 쓰겠냐고. 절대 아니라고 했어. 우성 알파나 오메가는 치유 능력이 뛰어나. 그건 알지?”
“알아. 우성일수록 조금은 일반 알파 오메가들보다 뛰어난 점이 많다고.”
“맞아. 치유 능력도 뛰어나고 신체 능력도 뛰어나지. 그래서 우성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아. 우성과 결혼하려는 사람도 많고 우성의 정자를 원하는 이도 많지. 우성의 정자가 블랙마켓에선 억대로 거래도 된다고 하더군.”
“허… 처음 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우성 능력의 두 배 이상이야. 나라에서도 그 이상은 테스트하지 않았어. 무섭기 때문이지.”
“그럼 너 나랑 대련할 때 힘을 빼거나 안 쓰는 거였어? 원래는 더… 강하고?”
“아니, 그건 아니야. 지금 나는 억제제를 특이한 것을 쓰고 있어. 일반 알파 정도로 모든 알파 세포 능력을 저하해 놓은 거야. 아, 이건 약물 테스트 통과 받은 약이고, 문제없어. 아는 사람은 몇 없지만…. 그래서 내 능력은 지금 일반 알파와 열성 알파 정도 사이의 힘을 쓰고 있는 거야. 그 힘에서 최선을 다한 거니 너랑 대련할 때 한 치의 거짓도 없었어. 정말 나는 최선을 다해 너와 대련 한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마.”
“뭔 걱정. 그게 아니라. 나는… 그럼 지금까지 네가 봐준 건가 해서 그러면 그림이 이상하잖아. 좀 속상하고 기분도 나쁠 것 같다. 아니라고 해서 다행이긴 한데. 또 너로선 이게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억제하면 몸은 괜찮은 거야?”
“음… 일단 지금까진 아무런 이상이 없어. 주치의가 걱정하고 있긴 한데 올림픽 끝나면 억제제의 양을 조금 조절하자고 하긴 하더라. 언제 터질지 모른다고.”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그래, 네 밀을 듣고 보니까 그렇네. 네 아버지가 옳아. 정당하게 사용할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비겁하고 더러운 수를 쓰지 않겠지. 한국 사람들인 거야?”
“여러 가지. 한국도 있고, 중국도 있고, 러시아도 있어. 다행인 건 그들 사이에 이게 더 퍼져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건지. 그렇게 빠르게 퍼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야.”
“쓸데없는 의리네 진짜. 하…. 힘들었겠다. 너.”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이미 받아들이고 있어 전부. 이게 지금의 내 상황이니까. 하지만 난 내 주위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건… 못 참을 것 같아. 아버지들, 재우, 태은이 그리고 너….”
“나…?”
“지금까지 내가 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해? 너도 위험해서야.”
“나?? 내가 왜?”
“말했잖아. 기숙사 앞에 수상한 사람이 있었다고. 너도 타깃이 될 거야.”
“…날 붙잡아도 아무것… 잠시만, 혹시 말이야. 날 붙잡아서 인질로 잡은 다음 너에게 뭔가를 요구하거나…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건 아니지?”
“…맞아.”
“야, 그럼 내가 네 짐이 될 수도 있다는 거잖아.”
이건의 말에 한태경은 내심 놀랐다. 솔직히 이건이 자신을 탓하고 욕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 때문에 앞으로의 생활이 불편해질 거고, 힘들어질 거고, 여러모로 사람들을 경계해야 하는 일이 생길 테니까. 왜 내가 너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라고 말을 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와 미친놈들. 그런 건 생각도 못 했다. 날 이용해서 널 협박하려고 들어? 야, 웃기지 마! 절대 그런 일 없어. 내가 가만둘 줄 알아? 너 내가 혹시나 납치당하면 나 찾으러 오지 마. 내가 다 박살 내버릴 테니까. 넌 그냥 경찰에 신고만 해! 알았지?! 아 열받네.”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 이런 상황을 만든 내가….”
“왜? 너도 피해잔데. 그놈들이 미친놈이지. 그리고 어떻게 가족과 친구를 건드려? 그것들이 인간이야? 아 맞다 바퀴벌레라고 했지. 그 말이 딱 맞네. 인간이면 절대 그런 짓 못 하지. 야 한태경. 기죽을 필요 없어.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 뭘 잘못했는데? 없어! 진짜 없어. 그리고 앞으로 나도 경계하고 조심할게. 너한테 절대 짐 될만한 일 없을 거다. 약속할게.”
언제나… 너는 나를 구한다. 네 곁에 있으면서 나는 언제나 위안을 받는다. 서이건, 넌 그것을 알까? 네 한마디가 나를 몇 번이나 구했는지.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래, 아 생각하면 할수록 열받네. 진짜 미친놈들 아니야?”
혼자 열받아서 중얼거리는 이건을 뒤로하고 화장실에 온 태경은 문에 기대어 두 얼굴을 감쌌다. 그간 참고 참았던 힘듦이 서이건의 말 한마디에 눈물이 되어 터져 나왔다. 정말 고맙고 고마웠다. 세수하고 밖을 나가니 서이건은 커피 한 잔을 더 내려서 마시고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오늘 맛있는 거 먹었어?”
“아니,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먹지도 못했어.”
“오, 그러면 라면 먹을래? 내가 끓여 줄게.”
“넌 오늘 많이 안 먹었어?”
“많이 먹긴 했는데 먹는 것보단 이야기하느라 바빠서 배가 금방 꺼졌어. 세 개 끓일까?”
“그래.”
“곧 체중 조절도 해야 하니까. 지금 먹어두자.”
“내가 끓일게.”
“됐어. 내가 끓여. 넌 앉아 있어.”
이건이 냄비에 물을 받고 라면 사둔 것을 꺼냈다. 작은 냉장고에 있는 달걀과 김치도 꺼내 세팅하고 끓는 물에 라면을 넣어 끓이는 것을 보고 한태경은 웃음이 났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서이건에게 다가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으악! 놀랐잖아! 뭐 하냐? 징그럽게.”
“고마워서.”
“뭐가?”
“이야기 다 들어줬잖아.”
“음… 나야말로 고마운데. 그런 이야기 잘하지 못하잖아. 솔직히. 그런데 나 믿고 이야기해 준 거잖아. 그러니까 나야말로 기쁘다. 그리고 그놈들 너무 무서워하지 말아. 내 발차기를 막는 사람이 유일하게 너랑 진 사범인데 그 실력으로 뭉개버리면 되지. 물론 나도 그럴 거고. 아, 수프 안 넣었다.”
얼른 수프를 뜯어서 넣는 손을 보며 한태경은 이건의 어깨에 자신의 이마를 대었다. 이건의 페로몬이 느껴진다. 같은 알파의 페로몬, 하지만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거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더 오랫동안 이러고 싶었다. 이 사실을 알면 서이건은 징그러우니까 얼른 떨어지라고 하겠지.
“다 됐다. 더우니까 좀 떨어져.”
음… 뭐 오래 하지 않아도 이렇게 떨어지라고 하겠지만. 태경은 아쉬워하며 이건에게 떨어졌다. 방금까지 한태경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리 없는 이건은 티 테이블에 라면을 올려 두고 접시 두 개와 젓가락을 두고 한태경을 불렀다. 의자에 앉아 나눠주는 라면을 먹으며 아까 연회장에서 느꼈던 불안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이 시간을, 이 상황을, 그리고 서이건을 소중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완연한 여름이 되었다.
더불어 여름 방학에 들어간 학교는 조용하고 잔잔했다. 이건과 태경은 올 하반기에 있을 국대 선발전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에서 훈련을 계속하기로 했고, 강유한은 매주 목요일에 이건과 태경을 찾아와 함께 상담을 진행했다.
“둘 다 운동 안 힘들어?”
“더워서 지금은 좀 힘들긴 한데 어쩔 수 없죠.”
“체육관에 에어컨은 나와?”
“나오긴 하는데요, 감독님이 잘 안 틀어요. 더위 견디는 것도 훈련이라고.”
“와….”
선배는 계속 이야기하고 말을 걸고 새로운 주제를 꺼내긴 하지만 대답하는 건은 전부 이건이었고, 태경은 그저 자신에게 오는 질문을 단답형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마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선배를 보자니 이건은 마음이 아팠다. 아무래도 아직 태경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진 사범 만나서 강유한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진 사범은 쉽게 포기가 안 된다는 이건에게 그렇게 말했다.
‘네가 최선을 다하고, 다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 사람이 널 보지 않으면 포기해. 잘못하면 그 선배에게도 민폐일 수도 있어. 이건아. 그 사람을 위해서 네 마음을 정리하는 것도 사랑이다?’
그런 감미로운 조언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솔로인 것에 비해 은근 사랑꾼이란 말이지. 이건은 진 사범을 생각하며 웃었다. 아직 최선을 다했다고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는 선배를 놓아줘야 할 때가 아닌가 싶었다. 선배의 마음이 너무 한태경을 향해 있으므로… 정말 좋아하니까 응원해 줘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