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을 톡톡 건드리는 느낌에 힘겹게 눈을 떴다.
이미 세상은 핏빛이었고 귀에선 시끄러운 이명이 울렸으며 세상은 천둥ㆍ번개로 곧 멸망할 것처럼 느껴졌다. 쏟아지는 빗방울이 아무리 핏빛을 씻으려고 했지만, 더 번지기만 할 뿐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나는 너를 찾았다.
네 이름을 불렀다. 네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 순간에 내가 간절히 하고 싶던 말을 꺼내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그래서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있는 힘껏 너를 안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날 잊으면 안 돼. 부탁이야. 절대로 날 잊지 마.
◆
"자기, 오늘 우리 집에 갈래? 나 곧 히트 사이클인데…."
오메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검은 그림자가 가득한 골목길에 울렸다.
"그래도 괜찮겠어? 나 오늘 자제 못 해서 당신 임신시킬지도 몰라."
"무슨 말 하는 거야 진짜."
그 대화 내용은 조금은 누군가가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고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 소름 돋아 할 수도 있었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문제는 소름 돋아 하는 사람이 당사자들이라는 거지만. 그들은 좀 더 과장하며
골목길을 걸으면서 계속해서 민망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리고 오메가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야 이 걸레 새끼야!!"
골목길을 채우고 있던 불온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와 오메가를 향해 돌진했고, 그 옆에서 팔짱 끼
고 있던 알파가 얼른 앞을 가로막고 그림자의 팔을 붙잡고 꺾었다. 쨍그랑하면서 그림자가 들고 있던 칼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걸 본 알파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주제에 칼도 가지고 있네."
발로 얼른 그 칼을 쳐서 멀리 밀어 버리고 자신에게 붙잡혀 끅끅하는 이상한 소리만 내는 그림자의 배를 후려치자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진 검은 그림자가 가로등 빛에 의해 추한 모습이 드러났다. 뒤룩뒤룩 살이 쪄서 얼굴에 심술보가 가득한 남자는 씩씩거리며 몸을 힘겹게 일으키려 애썼다. 그 모습을 보며 이건은 남자의 배를 발로 꾹 눌렀다.
"시발, 너 뭐야? 너 뭔데 은석이 옆에 있는 거야! 어?!"
은석이는 저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오메가였다. 남자가 오면 바로 경찰서에 신고하라고 했던 이건의 말대로 한 것인지 두 손은 핸드폰을 꼭 쥐면 벌벌 떨고 있었다.
"너는 뭔데 여기서 저 사람을 괴롭히는데?"
"나는 은석이 알파야! 내가 은석이 알파라고!!"
"스토커 주제에 무슨. 요즘 세상에 오메가 스토커하고, 칼 들고 쫓아오면 처벌이 무시무시한 거 몰라?!"
"은석이가 내 건데 내가 무슨 스토커야!! 은석아 말 좀 해봐. 내가 네 알파지? 그렇지?"
"아니, 난 너 몰라. 네가 누군지 모른다고. 그러니까 날 좀 내버려 둬."
"야!!"
쓰레기가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오메가가 다시 몸을 움츠리자 이건이 슬쩍 그 쓰레기의 시야를 가렸다.
"은석 씨 원룸 입구 안으로 들어가 있어요. 경찰이 곧 올 테니까."
"네. 네."
이건의 말대로 원룸 입구로 오메가가 들어가자 쓰레기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쓰레기가 발광을 시작했다. 은석이 내놓으라고 거머리처럼 기어서 이건의 몸을 붙잡았고, 이건은 정말 보이지 않는 곳만 골라서 그를 두드려 패고 곤죽을 만들어 놨다. 얼마 안 가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가 앞에 서고 차에서 내린 경찰들은 이건을 보고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네요. 서이건 선수."
"이제 은퇴했는데 선수는 좀 빼세요."
이건이 싱긋 웃으며 경찰들에게 인사하면서 손에 쥐고 있던 쓰레기의 멱살을 놓았다. 털퍼덕하고 쓰레기가 바닥에 낙하했고, 의식이 없는 그를 보며 경찰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놈은 또 뭔 짓을 한 겁니까."
경차의 말에 이건은 주머니에 있던 USB와 사진 몇 장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