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저 특이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파국의 이니시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오색 빛깔의 굉장히 화려한 문구가 마치 게임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시스템 창의 모습에 의아하게 눈동자를 굴리기도 잠시,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의 조각에 혼미하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파국의 이니시아>라니! 당연히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내가 한동안 밤을 지새워 가며 읽을 만큼 상당히 재밌게 본 판타지 소설이었다.
그런데 그 소설 속 시스템 창이 왜 내 앞에……? 설마 너무 몰입하는 바람에 꿈까지 꾸게 된 건가?
근래에 부장님의 등쌀에 못 이겨 며칠을 내리 야근했더니 이젠 별 이상한 꿈을 다 꾸는구나 싶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저 웃으며 눈앞의 화사한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SYSTEM WARNING!]
“……어라.”
상황을 마냥 우습게만 여기던 내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건, 누가 봐도 위험해 보이는 경고 문구가 흉흉한 붉은빛을 뿜어내며 번쩍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본 시스템은 플레이어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다음 중 하나를 선택해 주세요.]
-시간 제한 5초-
[1. 내 사랑, 오늘도 예쁘네?]
[2. 너였냐? 감히 날 홀린 게.]
곧이어 느닷없이 떠오른 새로운 창에는 황당한 선택지가 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도통 입에 담긴 힘든 이 누추한 문장들은 도대체 뭐 하자는 선택지냐……?
“내 의견을 존중할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은데……?”
게다가 질문도 없는데 선택지만 덜렁 있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뭐에 대한 답인지는 알려줘야 선택할 거 아니냐고요.
[5, 4, 3……]
기막힘에 눈앞의 창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데, 그런 나를 재촉이라도 하듯이 숫자가 잇따라 깜빡이며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단에 그려진 폭탄 그림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공포심을 심어주는 건 덤이었다.
다행히 선택지를 무시했을 때 받게 되는 페널티에 대한 설명은 없었지만, 오히려 없기 때문에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어차피 뭘 고르든 똑같을 것 같은데…… 굳이 고르자면 1번이 더 나은가?”
짧은 고민을 마친 뒤 1번을 꾹 누르자 별안간 나를 감싸고 있던 시공간이 서서히 비틀리기 시작했다.
[SYSTEM: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초기화됩니다. 로딩…… 1%]
“잠깐, 초기화? 뭘?”
그런데 이 수상한 시스템 창…… 왠지 아까부터 은근슬쩍 주어가 없는 것 같네……?
빠른 속도로 늘어나던 숫자는 곧 100%에 도달하며 찬란한 빛을 뿜었다.
“이거, 뭔가 좀 위험한 것 같은-”
그제야 초조함을 느낀 내 심장이 긴박하게 쿵쿵대며 점차 거세게 요동하기 시작했다.
그도 잠시, 시야에 다시 한번 새로운 창이 모습을 보였다.
[SYSTEM: 초기화 완료. 새로운 데이터를 불러옵니다.]
“아냐, 불러오지 마……! 멈춰, 멈추라고!”
‘이 망할 시스템!’이라는 뒷말을 마저 외치려던 순간, 까무룩 시야가 점멸했다.
* * *
“죄인을 죽여라!”
아, 시끄러워……. 머리 아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서서히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더듬더듬 눈을 뜨자 원인 모를 매캐한 검은색 연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백이강?”
흐릿한 연기 사이로 드문드문 비치는 누군가의 형상에 입술이 절로 움직였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가 백이강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그를 한눈에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