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외부 인사와의 회의 일정이라 널 데리고 갈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는 나른한 말소리가 마치 아이를 달래듯이 사근사근 날아들었다.
“……뭐,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날 가둘 것까진 없었잖아.”
미래를 알고 미리미리 대비해 움직이는 빙의자의 특성상, 한곳에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손해가 컸다.
최대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원작의 흐름을 주기적으로 파악해야만 현실로 돌아갈 확률이 높아졌다.
안 그래도 종잡을 수 없는 최종 흑막인 백이강에게 걸려서 돌아갈 확률이 까마득한데, 이렇게 감금까지 당해 버린다면 집에 돌아가는 건 그냥…… 글러먹었다고 보면 된다.
“잠깐 떨어진 사이에…… 불만이 많아졌군. 널 혼자 두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나.”
이윽고 흐음, 하고 생각에 빠지며 내는 소리가 잔잔하게 흘렀다. 가볍게 뱉은 소리일 것이라며 무심히 넘어가자니, 무언가를 고뇌하는 눈치였다.
잠깐만, 이러다간 다음 회의 때 정말로 날 데려갈지도 모르겠는데……?
뜬금없이 국무회의의 이물질로 등장해 모두의 눈총을 받을 바엔 그냥 하루 종일 침대에서 시체 놀이를 하는 게 훨씬 나을 듯했다.
“저기,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나 오늘 되게 잘 지냈거든?”
“하루 종일 외로웠겠네. 앞으로는 꼭 곁에 있도록 하지.”
망할 백이강은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는 듯했다.
물론 잠시 심심했던 건 사실이지만 네 부재를 이유로 그렇게까지 막 암울한 하루를 보낸 건 아니라고요……!
“글쎄, 난 잘 지냈다니까.”
“응, 시끄러워…….”
내 반박을 가볍게 무시한 백이강은 서서히 내 옆으로 몸을 눕혔다. 가까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윽고 뒷덜미까지 뻗은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내 뺨을 은근히 간지럽혔다.
“뭣…….”
왜 갑자기 옆에 눕는 건데? 심지어 가까워!
아까부터 예고도 없이 훅훅 들어오는 그의 돌발 행동에 동공의 떨림이 통 멈추질 않았다.
그러나 당황한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백이강의 기다란 속눈썹이 곧게 감겨 두 눈 아래로 가지런히 내려온 것이 보였다.
비록 잠들진 못하지만, 그는 종종 이렇게 짧게나마 자는 시늉을 하곤 했다. 그러는 이유를 물었을 때 백이강은 담담한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기억하는 거야.’
‘……기억?’
‘이러다간 영영, 잠드는 법을 잊을 것 같아서.’
오랜 시간 잠들지 못하다 보니 눈을 감고 누우면 숙면을 취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몸이 잊어간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간간이 잠드는 시늉을 하는 것이 그 나름의 기억 방식인 듯했다.
흠, 그럼 휴식에 방해되지 않게 내 방으로 돌아가는 게 좋으려나?
사실 내 방은 따로 있지만, 잠은 거의 백이강의 침실에서 잤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내가 잘 때면 백이강은 일하고 있었으니 이 큰 침대를 나 혼자 썼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내가 있으면 혼자 편히 쉬지 못할 테니까…… 역시 자리를 피해주는 게 좋겠지?
대강 사정도 알았겠다, 짤막하게 생각을 마친 나는 망설일 것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문득, 조심히 일어서는 내 손목을 붙드는 힘이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백이강의 새하얀 눈꺼풀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 마. 여기 있어.”
눈도 뜨지 않은 채로 백이강은 나를 붙잡았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퍽 듣기 좋았다.
“가봤자 거기서 거기지. 네가 날 황태자궁에 가뒀잖아.”
“그게 싫어?”
물음표를 끝으로 그의 감긴 눈이 천천히 틈을 보였다. 백이강의 단단한 보랏빛 동공이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