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황자인 피엘은 백이강처럼 흑마법을 쓰지는 못하지만, 대신 이론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영역의 최대 산출물인 소환진이나 마법진을 그리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침실 어딘가에는 남모르게 새겨진 마계의 언어들이 잔뜩 있다.
사실 피엘은 어릴 적부터 형인 백이강에게 강렬한 열등감과 패배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비록 정당한 방법은 아니지만, 어둠의 힘을 빌려서라도 백이강과 견줄 능력을 갖고자 하는 피엘의 어리고 아둔한 마음이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갔다.
“형체는 새가 맞긴 한데, 정확히 말하면 마계에서 온 마수야.”
“……마, 마계요?”
생각지도 못한 단어였는지, 켄의 아련한 갈색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일반인은 마계를 오랜 전설, 또는 동화책에나 나오는 허구쯤으로 알고 있으니 이상한 반응은 아니었다.
아마 지금쯤 켄은 내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빙의한 이후로 딱히 맨정신인 적이 없었으니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마법사가 있는 세상에 살면서 마계의 존재는 믿지 않는다는 게 좀 웃기긴 했다. 그렇지만 어쩌겠어, 이 세상이 그렇다는데.
“피엘이 그런 힘을 가졌다는 보고는 들은 적이 없는데.”
백이강도 뭔가 이상한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의문을 표했다.
당연히 들은 적이 없을 수밖에.
피엘은 백이강처럼 본인이 가진 힘을 쓰는 게 아니라서 흑마법이나 마계와 연관된 티가 나지 않았다.
마수, 즉 남의 힘이니 흔적도 안 남고…… 잘만 사용한다면 당하는 입장에선 상당히 난감한 힘이었다.
“그 새는 2황자가 직접 소환진을 그려서 불러낸 마수야. 그는 마계의 힘을 직접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대신 그 힘을 가진 마수를 부르고, 다룰 줄 알지.”
원작에서 켄과 마수를 이용한 계략으로 백이강을 몰아낸 피엘은 후에 메인 주인공인 3황자에게 이 사실을 들켜서 춥고 머나먼 북부의 폐성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게다가 이후로도 계속 나오는 백이강과는 달리, 피엘은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더는 원작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초반부에 잠깐 ‘반짝!’ 나타났다가 제 역할을 다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별똥별과 같은 단역 캐릭터였다.
하지만 피엘의 그 ‘반짝!’ 정도가 주연급이라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조기 퇴장 캐릭터라지만 피엘은 정해진 한계 내에서 힘을 다루는 백이강과 달리 전력에 끝이 없었다.
장소와 관계없이 소환진 또는 마법진을 그리고, 진 위에 본인의 피 몇 방울만 섞어낸다면 그 어떤 술수도 쉽게 부릴 수 있었다.
때문에 피엘의 힘은 가히 무궁무진했고, 또 위험했다.
이게 바로 금방 사라지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피엘이 주연급으로 나오는 이유였다.
마력에 각종 제약이 걸려 있는 일반 마법사에 비하면 피엘의 공격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또 어디서든 충분히 가능했다.
“소환술사라는 소리군.”
“어, 맞아. 딱 그거야.”
백이강의 나직한 한마디에 맞장구를 치자 켄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무언가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듯 보였다.
“그럼 설마 그때도…….”
잠시간 앓는 소리를 내며 고심하던 켄은 무언가 기억이 난 듯, 퍼뜩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했다.
“일전에 청도운 님께서 숲에 나타나셨을 때 근방이 전부 불탔다고 말씀드렸던 것, 혹시 기억하십니까?”
“으음, 내 등장 이펙트 말하는구나.”
나 때문에 황실 사유지의 숲이 불탄 것도 모자라 황실에서 극비리에 관리하던 독초 정원까지 싹 탔다며 빡빡 화내던 네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냐.
……아, 물론 나는 뒤끝이 없는 성격이라 깔끔히 잊었었다. 깨끗이 잊었는데 켄이 언급해서 기억한 거다.
“이펙…… 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2황자가 정말 그런 불길한 마법을 사용하는 자라면 그날 일은 2황자의 짓일 겁니다. 청도운 님께서 진짜 방화범이 아니시라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