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맨날 한정된 장소만 오가다 보니 그의 위세를 실감하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원작에서도 백이강이 황태자일 때의 입지를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병까지 숨기며 세간에 약점을 드러내지 않던 백이강에게 나라는 약점이 생겼고, 이후에는 당연하다는 듯 나를 빌미로 공격당했다.
다행히 내가 숲을 복구하면서 겨우 일단락됐지만…….
윽, 이래서야 걔가 나한테 고마워할 일이 없다는 사실만 더 도드라졌잖아! 이쯤 되면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오늘 3황자의 신성력을 빼앗아서 불치병을 고쳐준 다음 감사 인사를 듣고 말겠어!
그렇게 다시금 의지로 불타오르던 나였지만, 라타의 중간 수정이 3시간이 넘도록 지속되자 불꽃이고 뭐고 다 꺼져 버렸다.
지쳐서 당장 의자에 앉고 싶은데 라타는 옷차림이 흐트러진다며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라타 님, 앉고 싶어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앉고 싶…….”
“예?”
“아니, 그냥 아주 잠깐이라도.”
“잘 못 들었습니다?”
이러는데 어떻게 앉냐, 어떻게!
눈을 까뒤집으면서 수정 중인 사람 앞에서 엉덩이를 붙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슬슬 끝날 기미가 보인다. 안나가 일찍부터 나를 재촉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미리미리 오자고 한 거구나.
“거의 끝났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다신 안 오겠다며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데 기운이 쫙 빨려서 그런지 헛웃음도 안 나왔다.
앞으로 재단실 쪽으로는 숨도 안 쉴 거다. 진짜다.
“이거 하나만 하시면 됩니다.”
지치지도 않는지, 라타가 야심 차게 꺼내 든 것을 확인한 나는 막연하게 커지는 동공을 차마 말릴 수 없었다.
그의 손에는 휘황찬란한 꽃 무더기가 들려 있었다. 중간중간 장미도 있었다. 그러니까, 커다란 가시가 듬뿍 박힌 장미가.
“그걸…… 어디다가요?”
“마법사님 머리에 꽂으면 딱입니다.”
“제 머리에?”
“예.”
“그걸 다요?”
“예. 이게 바로 하이라이트거든요.”
허허, 사람 좋은 얼굴로 웃던 라타가 살짝 손을 흔들자 장미 줄기의 뾰족한 가시가 빛을 받고 반짝였다.
저거 흉기 아니야? 흉긴데? 맞는 것 같은데? 아니, 겉으로 보이는 가시라도 좀 떼고 오든가!! 무슨 사람이 이렇게 꾸밈없이 솔직해?!
“저기, 라타 님? 꽃에 가시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것도 좀 많이.”
“자고로 아름다움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지요. 자, 마법사님. 이리 오십시오. 그 예쁜 머리에 안전하게 꽂아드리겠습니다.”
저게 무슨 개소리야! 저거 꽂으면 무조건 피 본다. 저것만은 절대 안 돼!
위기를 감지하자 살고자 하는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빛의 속도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도 잠시, 라타의 매서운 눈이 빠르게 나를 잡아챘다.
“쯧, 잡아.”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라타가 스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건장한 장정들이 위협적인 얼굴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금 얌전히 돌아오시면 안전을 약속하겠습니다.”
“마법사님, 본궁에서 마법 공격은 금기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머리에 꽃 하나만 꽂으면 평화롭게 끝날 일입니다.”
곧이어 뚜둑, 하는 관절 꺾는 소리가 선명하게 고막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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