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은 미안. 결국 못 막았네.”
사유야 어찌 되었든 결국 황제 동상의 머리통이 날아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백이강은 덤덤한 얼굴로 가볍게 실소를 흘렸다.
“누가 들으면 번개를 네가 친 줄 알겠군. 사과하지 마.”
잠시 눈이 마주치는가 싶더니, 그는 금세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으니까.”
“넌 신이 아니야. 네가 모든 걸 막을 수는 없어.”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짚어주는 백이강이었다.
‘난 신이 아냐.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그걸 너한테 말해줄 순 있지. 어쩌면 도와줄 수도 있고.’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막상 당하니까 좀 쓰라리긴 하네…….
이번 일은 내가 방심했다. 이미 겪은 적 있으면서 잊고 있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원작에 지는 일은 없을 거다. 이런 허무함은 한 번으로 족하니 말이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마음껏 화내도 돼. 어쨌든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실없는 소리에 재능이 있군.”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백이강이었다.
사람이 말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좀 해라!
“진짜 화 안 낼 거야?”
“……내가 널 탓할 거라 생각했나?”
순간 백이강이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던 백이강의 날카로운 눈매가 서서히 아래로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럴 리가 있나. 아쉬워서 먼저 찾아온 사람에게.”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연한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
꼭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부드럽고 다사로운 음성이었다.
“아, 몰라. 아무튼 내가 잘못했으니까 빨리 화내. 마음이 불편해서 안 되겠어!”
얜 왜 갑자기 착한 척이야, 안 어울리게?! 이러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잖아……!
차라리 다른 때처럼 헛소리한다며 개무시하는 게 나을지도…….
“됐으니 평소처럼 바보같이 웃기나 해라. 너 그거 잘하잖아.”
“야, 내가 언제 바보같이 웃었다고 그래?!”
어둑하게 저무는 저녁노을을 등에 진 우리는 전처럼 티격태격하며 황태자궁으로 돌아왔다.
“청도운.”
먼저 자라며 나를 제 침실로 끌고 온 백이강은 내가 이불을 덮는 것까지 묵묵히 지켜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응?”
“다시 말하지만 신경 쓰지 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거기에 네 잘못은 없어.”
비단 오늘만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은 묘한 뉘앙스였다.
하지만 나를 향해 쏟아지는 백이강의 보랏빛 시선이 지독하게 적막한 탓일까,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너는 안 자?”
“오늘은 일이 있어서. 먼저 자라.”
말을 마친 백이강은 침실을 두르고 있는 결계를 한 번 점검하는가 싶더니, 이내 방을 나갔다.
그리고 나는 몰랐다.
그 이후로 한동안 백이강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될 줄은…….
* * *
“……건국제가 당장 내일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이에요?”
다음 날, 집무실에 들어서자 보인 것은 백이강이 아니라 그의 업무를 분담하고 있는 보좌관 필립의 퀭한 얼굴이었다.
단언컨대 저건 철저히 야근한 얼굴이다. 한국에 있을 때 내가 저 얼굴로 살다시피 했으니 모를 수가 없다.
늘 단정하고 정갈한 모습만 보이던 필립이 저렇게까지 시달리다니…… 정말이지 어지간히도 바쁜 모양이다.
“황후 폐하께서 안 계신 지금으로써는 제국의 모든 행사 총괄 책임이 전하께 있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물론 그건 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