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안이 백이강을 ‘전하’라고 부르는 것도 못내 어색했다. 피엘만 해도 백이강더러 ‘형님, 형님’ 하며 꼬박꼬박 신경을 긁지 않았던가.
바로 위 형제인 피엘이 그러고 다니면 무의식적으로 배울 법도 한데 이안은 안 그러네. 나름대로 선은 지키겠다는 건가?
이안을 따라 조심스레 열린 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환하고 심플한 분위기의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오는 이를 막지 않겠다는 것처럼 출입문부터 시작해서 방의 모든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꼭 이안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환기가 잘 돼서 그런지 방 분위기가 굉장히 상쾌하고 산뜻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데르지오 황실의 3황자, 이안입니다.”
세상에…… 예의 바른 것 좀 봐. 심지어 난데없이 찾아온 건 나인데 먼저 인사했어! 황족이 저러기 쉽지 않은데!
이안은 여러 의미로 형제들과는 느낌부터 달랐다. 원작에서 본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행동이지만 그렇기에 더 의미가 깊었다.
그도 그럴 게, 당장 피엘과 백이강만 보더라도 원작과는 조금씩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황실 소속 마법사 청도운입니다.”
덩달아 예의가 입에 발린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이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이 보였다. 아까 마신 것과 같은 색인 걸 보니 소다 향이 나던 그 술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저 냄새에 홀려서 무작정 악당 뒤꽁무니 밟으러 온 건데, 대어를 낚을 줄이야. 이안과 이렇게 빨리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게 웬 횡재냐!
그나저나 이렇게 문을 다 열어둬서 술 냄새가 바깥까지 흘러나왔던 거구나?
잔이 하나인 걸 보면 진짜 혼자 마시고 있었다는 건데…… 황궁으로 복귀하자마자 어울리지 않는 청승이네.
“실례가 안 된다면, 한잔하시겠습니까? 때마침 잔을 기울이던 참인데…….”
이안의 말에 옆에 있던 시종이 눈치껏 재빠르게 새 잔을 내왔다.
“아, 괜찮습니다. 이미 마시고 왔거든요.”
손을 내저으며 가볍게 사양하자 이안의 낯빛이 살짝 어둡게 가라앉았다. 뭐, 뭐야? 왜 저러는데!
“……조금 쓸쓸하던 참입니다.”
“주세요. 안 그래도 마시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네요. 하하!”
빠르게 태세를 바꿔 냉큼 잔을 건네받자 이안은 언제 침울했냐는 듯 생긋 웃더니 내 잔을 손수 채워주었다.
아, 망할. 순식간에 말려들었네.
하지만 다른 일에는 표정 하나 안 변하던 인간이 거절 한 번 했다고 우울해하는 꼴을 볼 수가 있어야지.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나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걸 볼 때마다 마음이 약해지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고질병이었다.
백이강이 간혹 답지 않게 약한 모습을 보일 때면 나도 모르게 받아주던 것들이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어라, 잠깐. 설마 내가 이래서 한국에 있을 때 매번 회식 고정 멤버였던 건가?
불현듯 술자리에 내가 없으면 아무도 자기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며 징징거리던 김 과장의 넙데데한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진실을 깨달아 버렸다.
“마법사께서 이리 함께해 주시니 든든하군요.”
이안은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금빛 머리칼을 능숙하게 쓸어 넘기더니 말끔하게 잔을 비웠다.
그를 따라 나도 잔을 비웠다. 감미로운 액체가 달콤한 향을 내며 목구멍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마치 안주처럼 걱정이 올라왔다.
아, 어떡하지.
이안의 성격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주인공이니만큼 원작 분량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니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어떻게 구슬려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겉으로는 피엘처럼 상냥하게 구는 것같이 보인다. 하지만 둘은 명백히 다른데, 피엘은 겉과 달리 속이 까만 반면 이안은 안팎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