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전부 죽여 버릴까 하는데.”
“어… 어어?? 야, 화나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건 좀…!”
암만 황제라고 해도 그런 학살을 하면 폐위당하거든? 이안이 쫓아내는 게 피엘이 아니라 네가 될 거라고!
곤란한 얼굴로 그를 말리고 있는데, 백이강이 손가락으로 내 콧잔등을 톡 건드렸다.
“그냥 해본 소리다. 놀라기는.”
“무슨 농담을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하냐.”
실없는 소리를 나누며 본궁을 지나치는데, 곳곳에 퍼져 있던 독이 깔끔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이렇게 깔끔하고 빠른 일 처리라니… 그래도 마탑이 마탑인 이유가 있긴 한 모양이다.
곧이어 황태자궁에 도착한 우리는 황제의 서거를 애도하는 검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별안간 백이강이 나를 돌아보며 자못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즉위식은 사전에 손을 써서 내일로 최대한 앞당겨 두었다. 애도 기간이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장례식도 예정되어 있고…. 당분간 정신없을 테니 각오해.”
“윽. 할 일이 많다는 소리를 그렇게 무섭게 할 필욘 없어.”
한숨을 쉰 나는 백이강을 따라 집무실로 나섰다.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은 필립이 퀭한 눈가를 드러낸 채 새로운 일꾼… 아니, 우리를 반겼다.
* * *
한참을 어수선한 황궁 분위기를 가라앉히며 이것저것 정리하고 나니 어느덧 야밤이 되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2시였다.
이마저도 필립이 백이강이 맡긴 일들을 사전에 착실하게 해준 덕분에 일찍 끝난 것이었다.
아니, 아니지. 끝난 건 아니다. 그저 첫 번째 업무가 일단락되었을 뿐, 아직 셀 수 없이 많은 일거리가 만찬처럼 준비되어 있었다.
황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서류부터 시작해서 즉위식 준비, 장례 절차 승인을 비롯해 반드시 거쳐야 할 귀족 회의, 그리고 국가 애도 기간 공표 및 기타 여러 업무가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렇게 굴렀는데 아직도 이렇게나 많이 남았다니….”
“오늘은 이쯤 하지.”
평소 같으면 약한 소리 말라며 핀잔을 주었을 텐데, 웬일로 백이강이 내 투덜거림을 받아주며 몸을 일으켰다.
“필립, 너도 그만 가라.”
“예…? 저, 전하.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갑자기 이렇게 자애롭게 나오시니 너무 불안합니다.”
“그럼 아침까지 여기 처박혀 있든지.”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좋은 밤 보내십시오.”
눈 깜짝할 새에 재킷을 챙겨 일어난 필립은 야무지게 책상 위를 정리하고는 발 빠르게 집무실을 나갔다.
필립이 저렇게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인지 미처 몰랐는데…….
“백이강, 우리도 가자.”
깊은 밤, 황궁을 밝히는 은은한 조명과 황성의 불빛들이 창밖으로 내려다보였다. 가만히 창 아래 광경을 바라보는 백이강의 곁에 다가선 나는 슬쩍 그의 손을 잡았다.
“피곤해 보이는군.”
담백한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백이강은 한참 나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낮게 웃으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너도 피곤해 보여.”
“…응.”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그는 살며시 몸을 낮춰 내 품에 고개를 묻었다.
사실, 내게 황제란 그저 활자로 만들어진 일개 조연에 불과한 이였다.
하지만 백이강에겐 피를 나눈 아버지였다. 평소 황제를 고깝게 여기던 그라도 가족의 죽음 앞에 마냥 유쾌하지는 못할 터였다.
“위로해 줄까.”
달리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그저 등이나 토닥여 줄 생각이었다. 원한다면 만사가 귀찮은 그를 위해 기꺼이 이동 마법으로 방까지 데려다 줄 의향도 있다.
그런데 백이강이 뭔가… 이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마침 받고 싶은 위로가 있긴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