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강…… 당장 나한테서 떨어져! 아니지, 비켜! 내가 갈 테니까!”
“머리 울려. 조용히 해.”
식겁한 내가 황급히 도망가려 하자 백이강이 등 뒤에서 내 허리를 한 손으로 잡고 끌어당겼다.
어찌나 강하게 틀어잡았던지, 갈비뼈가 다 아팠다.
“윽, 이거 놔. 난 나갈 거야, 내 방에 갈 거라고!”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네 ‘선물’을 하나 챙겨 왔는데.”
내 비명 너머로 넌지시 들려오는 충격적인 말에 그만 온몸이 얼어붙었다.
뭘 챙겨 와?
“그거 아까 다 태운 거 아니었어? 다 태웠는데? 내가 봤는데?”
“자꾸 보니 썩 나쁘진 않더군. 매일 보던 거라 친숙하기도 하고. 그래서 하나 남겨뒀다.”
백이강은 슬쩍 웃으며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나를 붙들지 않은 다른 한 손에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커다란 딜x가 홀로 외롭게 들려 있었다.
저걸 또 보게 될 줄은, 그것도 백이강의 손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보다…… 지금 본인 거가 저거랑 비슷하다…… 뭐 그런 저질스러운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 참, 나를 앞에 두고 어딜 감히.
“하긴, 나도 친숙해. 매일매일 지겹도록 보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물론 실물이 더 낫지만.”
내 노골적인 도발에도 백이강은 아무 말이 없었다. 보통 이런 분위기에서는 맞받아치는 게 정상적인 대화 흐름인데, 왜 저래? 재미없게.
그러나 나는 이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의 악마 같은 입꼬리가 마치 ‘걸려들었네’라고 말하듯 즐겁게 위로 솟아 있던 것을…….
“그래? 그렇게 자신 있다니 실물이 궁금해지는군.”
“……어?”
잠깐, 이게 아닌데.
* * *
“콜록…….”
“청도운 님, 여기 말씀하신 따뜻한 물입니다.”
“아, 고맙…… 콜록.”
안나가 건네준 물컵을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든 나는 천천히 물을 들이마셨다.
X발, 백이강……!
“많이 아프세요? 늦여름 감기는 오래 앓는다던데……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혹시 모르니 옆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따스하게 날아드는 안나의 걱정 어린 말에 없던 눈물도 다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게다가 아셀도 내가 걱정되었는지 옆에서 조용히 병 수발을 들고 있었다.
이렇게 다정한 남자가 왜 아직도 애인이 없는 건지 정말 희대의 미스터리네.
“아셀, 진짜 애인 없어요? 콜록.”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지.”
“그냥, 콜록. 제일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없다니까 이상해서요.”
내 말에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던 아셀은 곧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뭐지,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아셀의 새까만 머리와 그 아래 보석처럼 반짝이는 푸른 눈, 날렵한 콧날은 객관적으로 봐도 상당히 준수한 외모였다.
꼭 순정 만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외모랄까……. 따지고 보면 애당초 웹툰 캐릭터가 맞긴 하지. 장르는 다르지만.
“왜요, 콜록. 뭔데? 궁금하게.”
묘한 표정을 본 내가 재촉을 던지자 아셀의 무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아, 나는 무표정 캐릭터들이 표정 생길 때가 그렇게 짜릿하더라.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자 아셀의 입술이 드디어 달싹였다.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입니다.”
“나 재미없는 거 좋아해요.”
“들은 걸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하는 데 재능이 있어요, 내가.”
쯧쯔. 무슨 말로 방어해도 먹히지 않을 거다. 아셀, 그만 포기하고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그동안 노답 싸가지 백이강에게 말로 얻어맞으면서 생긴 나름의 말발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