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식사를 마쳤다. 음식과 별개로 백이강이 내가 먹는 걸 하도 빤히 쳐다봐서 뭘 먹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 먹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는 말에 꾸역꾸역 먹긴 했다만…. 막상 다 먹고 나니 드레스를 입을 수 있을지 새삼스러운 걱정이 밀려왔다.
물론 마법이 걸린 드레스이니 맞기야 하겠다만, 그게 나온 배를 가려주는 건 아닐 테니까….
“왜 그런 눈이지.”
“내 눈이 어때서?”
“불결해.”
돌아오는 대답에 그만 말을 잃었다. 제일 불결한 게 누군데 지금 나더러…!
“전하, 도운 님. 의상실로 모시겠습니다.”
때마침 들어온 아셀이 우리를 불렀다. 이제 식장에 들어갈 준비를 할 때였다.
“슬슬 일어나지.”
백이강과 함께 본궁으로 넘어가자 아셀과 안나 말고도 다른 기사들이 우리를 따랐다.
“그러고 보니 필립이 안 보이네?”
“필립에겐 따로 시킨 일이 있다.”
딱히 내용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필립이 황제가 쓰러진 뒤의 상황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오래도록 기다려 온 날이니만큼 대비를 소홀히 할 순 없겠지.
“그런데 아르테 측은 델시아가 보이지 않는데도 조용하네?”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아르테와 펜디움이 속한 북대륙에는 식이 시작되기 전, 신부가 하루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는 관례가 있답니다. 신부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를 높이려는 귀여운 관습이죠.”
곁에 있던 안나의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이해가 갔다. 이건 델시아가 약혼식 당일이 아닌, 전날 밤에 아르테로 떠나려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신기하네. 북대륙에만 이런 게 있는 거야?”
“음, 저희 아버지께서는 서대륙 출신이신데, 서대륙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약혼식 이후 결혼식 날까지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해요. 아마 대륙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을 거예요.”
원작을 글과 그림으로만 즐길 때는 볼 수 없던 소소한 디테일이 재밌게 느껴졌다. 없어도 그만일 관습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그것을 기꺼이 따르는 자들이 있다니.
‘이래서야 꼭 현실 같잖아.’
사람들을 단순히 조연, 주연 따위로 급을 나누며 책 속 등장인물일 뿐이라고 여기기에는,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당장 백이강만 하더라도 원작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다르지 않나.
피 칠갑을 하고 생명을 멸시하는 살벌한 눈으로 사람들을 차갑게 노려보던 이가 지금은 내 옆에서 되도 않는 청혼을 들먹이며 감정을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그의 온기를 내 손으로 느끼는 한, 이보다 현실감을 가지기란 어려울 거다.
“백이강, 델시아는 어디 있어?”
“황태자궁 안쪽에 응접실이 하나 더 있어. 그곳에 있다.”
그렇다면야, 그쪽은 걱정할 이유 없겠네.
“늦으셨습니다. 서둘러 이쪽으로 오시지요.”
의상실에 도착하자 라타는 갈 길이 멀다며 나를 어디론가 냅다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끌려가게 된 상황에 난감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백이강은 어느새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온통 둘러싸여 있었다.
저쪽도 만만치 않구나….
어제의 그 커튼 방으로 들어오게 된 나는 라타와 다른 디자이너들의 손에 인형처럼 꾸며지기 시작했다.
입고, 벗고, 또 입고, 뭔갈 꽂고.
당연하게도 나는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마네킹 주제에 말을 하면 안 된다나 뭐라나. 어떻게 인간들이 이렇게 한결같을 수가.
“하! 드디어 끝났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라타가 탄성을 지르며 걸음을 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