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운, 뭐 하냐고 묻잖아.”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날아가면서도 들어도 절대 백이강 목소리가 맞다.
고개가 쉽사리 돌아가질 않았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물론 내가 보고 싶다고 하긴 했지만 그게 지금 당장 튀어나오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흘기듯 겨우겨우 눈동자를 굴려 저편을 돌아보자 어딘가 잔뜩 수틀린 표정을 한 매서운 인상의 남자가 불쾌한 눈으로 이쪽을, 정확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백이강이었다.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늘 숨기는 게 많고 본인 일을 먼저 말해주지 않아 남에게 제 얘기를 듣게 하는 무정하기 짝이 없는 놈.
그러나, 그럼에도…….
막상 그가 오니까 지금껏 피엘에게 곤란함을 느끼던 것이 깡그리 날아갔다.
백이강의 존재 자체가 구원이 되다니, 인정하기는 싫지만 사실이었다.
“백이강? 네가 여긴 어떻게…….”
놀란 입이 천천히, 하지만 빠르게 움직였다.
피엘의 앞이니만큼 멋대로 아명을 불러선 안 된다는 이성이 박힌 머릿속과 달리, 몸이 멋대로 백이강의 등장에 반응하고 있었다.
어찌나 입술을 꾹 깨물었던지, 속이 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혀끝에서 단내가 씹혔다.
“네가 안 오니까.”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백이강은 간단히 답했다.
“그게 무슨.”
“네가 그랬잖아. 먼저 움직이는 건 늘 아쉬운 쪽이라고.”
말을 마친 백이강이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청도운. 나 지금 아쉬워.”
……우와아, 미치겠네. 쟤 갑자기 왜 저래? 난데없이 나타나더니 이렇게 적극적으로 구는 이유가 뭐야?!
마음 같아선 당장 피엘의 손을 뿌리치고 백이강에게 가고 싶긴 했다. 근데 피엘이 아직 나를 붙들고 있었다. 다행히 턱을 잡고 있던 손은 놓았지만 대신 내 팔목을 잡고 있었다.
“저하,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최대한 예의를 차린 얼굴로 조심스레 말을 마친 나는 슬금슬금 피엘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백이강의 등장 덕분인지 피엘은 더 이상 나를 붙잡지 않고 순순히 놓아주었다.
“잠깐.”
그러기도 잠시, 피엘이 나를 불러 세웠다.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단단하게 고막을 자극했다.
고개를 돌리자 피엘이 생긋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그건, 내가 당연히 제 쪽으로 와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감히 2황자의 말을 무시하고 갈 순 없으니 내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뒤에는 백이강이, 앞에는 피엘이.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우람하고 불쌍한 나…….
빙의가 이렇게 고단할 줄 알았다면 진즉 때려치웠을 텐데! 뭐가 좋다고 세 번씩이나 빙의해 가지고 이 개고생을!
아무튼, 속으로 아픈 숨을 삼키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피엘이 살며시 고개를 기울여 내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댔다.
“다음에 꼭 내 집무실에 들러주게. 우리에겐 아직 긴히 나눌 대화가 남아 있지 않은가.”
“……예.”
피엘은 곧 내게서 멀어졌다. 볼일이 다 끝났다는 후련한 얼굴이었다.
일말의 미련조차 남지 않은 그 표정을 보니…… 너도 백이강 못지않게 되게 짜증 나는 타입이네?
이건 백이강과는 결이 다른 빡침인데? 너만 할 일 끝나면 다냐!
언젠가 백이강보다 피엘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 그거 취소다. 절대 취소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곧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백이강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말소리라곤 내지 않는 가운데, 정말이지 엄청나게 적막하고 살벌한 분위기가 사방을 감쌌다. 칼만 없었을 뿐이지 거의 전쟁터 한복판급의 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