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시종이 가져다준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 나서야 매섭게 좁아진 피엘의 미간이 천천히 풀어졌다.
“잠시 흥분했군.”
따뜻한 찻물로 속을 진정시킨 피엘은 잠시간 입을 다문 채 상념에 잠겼다.
묵묵히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보이던 그는 머지않아 결론을 내린 듯, 앞에서 대기 중이던 심복을 향해 명을 내렸다.
“가장 성장 속도가 빠른 아킬라를 가져오거라. 내 직접 봐야겠다. 지금은 이르니 보는 눈이 없는… 그래, 새벽 두 시가 좋겠군.”
“존명.”
명을 받은 심복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이제 건국제도 끝났겠다, 피엘은 독초 정원에서 기르던 아킬라를 따로 마련한 공간으로 옮겨 비밀스럽게 재배하고 있었다.
이전처럼 독초 정원에서 기를 수 있으면 좋을 테지만, 건국제가 끝난 지금은 하일의 눈을 전처럼 완벽히 피할 수 없었다.
피엘이 아는 하일이라면 분명, 그가 독초 정원에 드나들고 있다는 걸 진즉부터 파악했을 테니 말이다.
형님이 황태자인 이상, 건국제 중에는 섣불리 행동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런고로 피엘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아쉬움을 뒤로한 채 빠르게 독초 정원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이후, 피엘이 꽤 신경 써서 마련한 공간은 독초 정원이었다면 당연히 갖췄을 기본적인 환경을 완벽히 따라가지 못했다.
독초 정원에서 아킬라를 기를 때보다 성장이 더뎌진 이유도 이 때문임을 피엘은 확신했다. 그가 직접 상태를 보고자 한 것도 이에 대한 보완점을 찾기 위해서였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평범한 아킬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의 극소량만 섭취해도 즉사에 이를 만한 세기의 맹독이 필요했다.
독에 내성이 강한 황족에게마저 영면을 선물할 수 있는, 그런 맹독이.
“너, 가서 청도운의 동태를 살펴라.”
곁에 있던 까마귀 마수에게 명을 내린 피엘은 빠르게 날아오르는 새의 날갯짓을 보며 순진해 보이는 눈매를 가늘게 늘어뜨렸다.
그는 언젠가 황제가 된다면 가정 먼저 할 일을 정해두고 있었다. 무엇이냐면, 마음에 들지 않던 몇몇 가주의 목을 잘라내고 그것을 황성 입구에 전시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보다 더욱 구미가 당기는 일이 있었다.
“…청도운을 옆에 앉혀둘까?”
딱히 의미를 둔 발언은 아니었다. 그저 요새 가장 거슬리는 자가 청도운일 뿐.
토도독, 피엘의 손끝이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유쾌함이 묻어나는 손짓이었다.
데르지오 황실의 위대한 황제가 된 제 옆의 두 번째로 빛나는 황후의 자리. 그곳에 오직 자신만 바라보는 청도운이 있다면.
그저 상상일 뿐인데도 꽤 괜찮은 장면이었다.
때마침 청도운이 그토록 수준 높다는 황실 마법사인데다 그 능력이 모두가 인정할 만큼 출중하고, 얼굴 또한 상당히 반반한 편이니 혼인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본디 그 수가 적어 귀히 여겨지는 마법사만큼 귀중한 혼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반발하는 아둔한 놈이 있다면 죽이면 그만일 테다.
무엇보다 제 옆에 있는 청도운을 볼 하일의 표정이 궁금했다. 제 것을 빼앗겼으니 화를 낼까? 아니면 지난날의 저처럼 포기하고 순응할까.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네.”
지금 피엘에게 궁금한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제 형님, 하일 데르지오의 불투명한 속내였다.
하일이 청도운에게 보이는 반응은 충분히 색달랐다. 그러나 일관됐다. 특정한 선을 넘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저 능력 있는 마법사를 가까이 두며 우대해 주는 건지, 아님 정말 다른 마음이 있는 건지 명확히 파악하기가 다소 난감했다.
겉으로 보기만 해서는 마음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또 가만히 지켜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제 형님이니만큼 누구보다 하일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것이 저만의 착각임을 피엘은 지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