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의한 지 어느덧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간 나는 온종일 백이강의 곁을 비서처럼 따라다니며 온갖 잡일을 떠안았다.
누가 황태자 아니랄까 봐 처리할 일도 지나치게 많아서 편하게 잠든 날이 하루도 없었다.
책사고 나발이고, 완전히 짐꾼이자 궂은일을 떠안는 전담 비서로 확정된 셈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곁에 있게 해달라는, 그런 되지도 않는 망언을 지껄이진 않았을 텐데…….
혹여나 중간에 몰래 탈주하려 들 때면 그를 귀신같이 눈치챈 백이강이 싸늘한 얼굴로 계약서를 코끝까지 들이밀곤 했다.
잠시라도 제 시야에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구는 백이강 덕분에 나는 정말 내가 바라던 대로 그의 ‘곁’에 있게 되었다. 그것도 온종일.
아, 진심 계약 파기하고 다른 착한 주인공이나 찾으러 가고 싶다…….
“야, 이강아.”
“…….”
‘백이강’은 그의 어머니인 선황후가 지어준 아명이었다.
그에겐 ‘하일 데르지오’라는 본명이 있음에도 독자들, 그리고 작가님마저도 본명보다 백이강이 더 입에 착 붙는다며 다들 그를 아명으로 부르곤 했다.
“이강아?”
“…….”
그 또한 황제가 지어준 ‘하일’이란 이름보다는 제 어머니가 지어준 ‘백이강’이라는 아명으로 불리는 것을 더욱 선호했다.
문득 원작에서 백이강이라는 아명에는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대목을 본 것이 떠올랐다.
힘의 정체가 궁금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돌아가신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좀 더 친해진 후에 묻는 게 좋을 듯했다.
언젠가 백이강이 선황후에 관한 대화를 꺼리지 않게 되는 날에…….
“이강아, 이강아, 이강아, 이강아.”
“내 이름은 ‘백이강’이다. ‘이강아’가 아니라.”
“그거나, 그거나.”
“전혀 달라. 남의 이름을 멋대로 바꾸지 마.”
하필이면 아명이 한국스러운 느낌이 나는 탓에, 나는 멋대로 그를 ‘이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본인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거야 부르는 사람 마음이지.
이쪽은 눈 뜨고 코 베이는 서류 사기까지 당해준 마당이니, 이런 사소한 것을 이용해서라도 소소하게 복수할 셈이었다.
불행히도 그는 이렇다 할 타격이 없어 보이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강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넌 마계를 어떻게 아는 거야?”
요 며칠간은 너무 바빠 보여서 물어볼 엄두도 못 냈는데, 마침 서류로 빼곡하던 책상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틈을 타서 나는 곧장 질문을 던졌다.
백이강이 마계에 대해 안다는 것을 단순히 우연으로 넘기기에는 조금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흑화 전의 백이강은 흑마법에 대해 일절 모를 텐데, 그런 그가 마계를 아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혹시 미래에서 회귀한 건 아닐까? 아니면 나처럼 빙의했다든지.
“고대 서적에서 봤다. 아주 오래전, 마계에서 온 악마들이 대륙을 침범했다는.”
“아…… 책.”
만약 저 말을 백이강이 아닌 다른 이가 했다면, 단순히 책에서 봤다는 이유만으로 전설로 여겨지는 마계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원작의 백이강은 평소에도 남들이 보지 않는 고대 서적을 해독해 가며 보는 괴이한 취미가 있었다.
백이강은 타고나길 천재일뿐더러 지식을 습득하는 노력도 재능에 못지않게 우수한 편이었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보면 책으로 인해 마계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는 그의 말이 딱히 거짓이라 보긴 힘들었다.
“고대 서적을 해독하다니, 대단하네.”
“별로.”
대수롭지 않게 들려오는 말소리가 어쩐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치 업무를 모두 마친 듯 보이는 백이강은 어느샌가 소파에 걸터앉아 붉은 양지로 만들어진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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