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내가 보이지 않나?”
담백하지만 뚝뚝 끊기는 서늘한 목소리가 너른 회의장을 울렸다. 그러자 장내의 귀족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세차게 젓기 시작했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는 눈치였으나, 당장 주군의 기분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럼 시력들이 안 좋은가. 왜들 내 뒤쪽을 그리 볼까……. 내 뒤에 단것이라도 있나 보지?”
조소가 밴 말소리가 느릿느릿 흩어졌다. 그제야 주군의 기분이 상한 이유를 깨달은 귀족들의 입이 한순간에 싹 다물렸다.
하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억울한 속내가 있었다.
본디 펜디움은 마법사가 귀한 곳이다. 그런데 그 드문 마법사 중에서도 청도운이 원체 유명해야 말이지!
불탄 숲을 싹 복구한 것은 둘째치고, 아랫사람에게 박하기로 소문 난 2황자가 청도운에게만은 쩔쩔맨다는 말이 있었다.
심지어는 황족으로서 프라이드가 높아 아무나와 접촉하지 않는다는 3황자와 손을 잡고 다닌다는 굉장한 목격담까지 존재했다.
특히나 3황자의 그림자들은 주군이 타인과 접촉하는 것을 발 벗고 나서서 말린다던데, 어째서 청도운은 가능했던 걸까.
그도 모자라 최근에는 황태자가 내쫓은 마법부의 수장을 말 한마디로 다시 불러들였다는 기이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황태자’가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하게 하다니. 이건 유례없는 일이며, 상상도 못 할 엄청난 일이었다.
정작 그 당사자인 황태자와 그의 마법사는 이 사태가 얼마나 충격적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지만….
게다가 저들은 본인들을 둘러싼 이런저런 소문에 대해서도 모르는 듯했다. 황태자가 이를 알았다면 청도운에게 흘러드는 시선들을 대충은 이해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건 필히 황태자의 충실한 보좌관인 필립 아스넬의 짓일 거다. 그는 업무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상부에 보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였다.
사건의 물줄기를 거슬러 마침내, 필립을 원인으로 짚어낸 귀족들은 올라오는 한숨을 애써 삼켜냈다.
쥐 죽은 듯 적막이 흐르는 장내를 무심한 눈으로 훑던 백이강은 이내 한 사람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에툴담 백작. 그대가 최근에 올린 노텔드 산맥 광산의 출납 보고서가 엉망이더군.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서 재무부의 재승인을 받도록. 그러지 못한다면 사업은 다른 이에게 넘기겠다.”
너그러운 얼굴과 상반되는 백이강의 냉담한 시정 명령이 들려오자 백작의 얼굴이 새파랗다 못해 허예졌다.
‘뭐? 내가 지금까지 이 광산 산업에 투자한 돈이 얼만데, 뭐를 누구에게 넘겨? 무려 전 재산의 반이 녹아 있는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소리 없이 절규하는 백작의 표정이 가히 가관이었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그 낯짝만 보더라도 백작이 황태자의 말에 얼마나 큰 절망을 느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예, 전하. 근 시일 내로 다시 올리겠습니다.”
느닷없는 채찍질에 에툴담 백작을 향한 귀족들의 시선이 안쓰럽게 변하기도 잠시, 백이강의 매정한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해서슨 남작. 사설 카지노에서 자네를 보았다는 소문이 수두룩하더군. 뒷돈을 챙겨 먹고 서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정계 귀족이라…. 내가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황태자의 저명한 보좌관, 필립 아스넬이 국정과 관련된 소문이라면 뒷골목의 개 혓바닥까지 털어서 주군께 일러바친다더니! 우습다 치부했던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아무도 모를 거라 자부했던 일이 황태자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오자 해서슨 남작의 얼굴이 치욕으로 시뻘게졌다.
“저,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오해가 있던 게 분명합니다.”
모르쇠로 발뺌하려던 남작 앞으로 두툼한 서류철이 ‘퍽!’ 하는 거친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종이 위에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 자료들이 낱낱이 기재되어 있었다.
반박이라곤 시도조차 못할 만큼 능란한 솜씨로 정리된 자료를 본 남작은 아픈 줄도 모르고 입술을 콱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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