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어째. 하일, 얼굴로 나한테 졌네?”
“읍읍!”
야, 이거 당장 놔! 나도 변명할 시간을 달라고!
델시아가 얄밉게 웃는 사이, 겨우겨우 몸을 비틀어 백이강의 손에서 벗어난 나는 뚝딱거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나는 그냥 델시아가 오늘 좀 화려하게 입은 것 같아서… 그게 예쁘다고……!”
“에이, 걱정 마. 도운아. 하일은 이런 걸로 화낼 만큼 속 좁은 남자가 아니니까. 그렇지?”
내 가련한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델시아는 그걸 뻔히 보면서도 여전히 킥킥대며 손사래를 쳤다.
백이강은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자리했다. 원래 델시아가 내 옆자리였는데 하필 맞은편으로 가는 바람에….
“그만 가라. 네가 여기 오래 있으면 곤란해.”
한참 무뚝뚝한 얼굴로 델시아를 노려보던 백이강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러자 델시아는 속 시원한 표정으로 냉큼 일어서더니 손을 흔들었다.
“그럼 그럼! 도운아, 이따가 약혼식 끝나고 보자!”
아, 그러고 보니 약혼식에서 황제가 쓰러지고 나면 정신이 없을 것 같은데. 차라리 혼자 갈 수 있게 마법진을 새겨주는 게 낫지 않으려나?
적당한 마력을 담아 완성된 수식을 새긴다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있을 거다.
“잠깐, 델시아! 그땐 혼란해서 만나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손에 마법진을 새겨줄게.”
좋은 수가 떠오른 나는 나를 지나치는 델시아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자 놀란 그녀의 눈이 일순 커다래졌다.
“아, 미안. 갑자기 잡아서.”
덩달아 놀란 내가 다급히 손을 놓으려는데, 델시아가 반대편 손으로 내 손등을 포갰다.
“아냐, 마음껏 잡아. 마음껏.”
생글생글 웃는 델시아의 기분은 상당히 좋아 보였다. 도대체 아까부터 뭐가 저렇게 신나는 거람.
아무튼 나는 델시아의 손등에 마법진을 새겨주었다.
딱 한 번, 마법진이 발동할 소량의 마력만 넣었으니 누군가 마력의 낌새를 눈치채기도 어려울 거다.
아무래도 이동 마법진 같은 건 좋지 않은 목적으로 쓰일 때가 많으니 엔간하면 들키지 않는 게 좋았다. 하물며 델시아는 마법사가 아닌 일반 황족이니까 더더욱.
게다가 이 마법진도 따지고 보면 좋은 목적은 아니니까…. 아무튼 들통나서 좋을 건 없다.
“마법진의 발동 수식언은 ‘델시아 리트리’야. 네 이름을 말하면 마법진이 작동해서 아르테의 황성으로 이동할 거야. 오직 네 목소리에만 반응하니까 실수로 말하지 않게 조심하고.”
최대한 남에게 들키지 말라는 주의와 함께 작동법을 알려주자, 델시아가 감명받은 눈으로 손등을 조심히 매만졌다.
“…약혼식 지켜볼게. 많이 당황스러웠을 텐데 믿고 도와줘서 고마워. 네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거야.”
진심이 담긴 따스한 녹색 눈이 나를 향했다. 빙의 이래 처음 듣는,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의 감사 인사였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에 순간 전신으로 소름이 비쭉 돋았으나, 애석하게도 델시아는 주연이 아닌 단역인지라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 참, 저런 인사는 원래 백이강이 해야 하는데 말이지.
어쨌든 이런 식으로 등장인물이 원하는 걸 들어주다 보면 지금처럼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가 돌아온다.
그러니 백이강도 머지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의 마지막 소원인 즉위가 정말 코앞이니까! 내가 진짜 지금까지 구른 게 억울해서라도 반드시 듣고 만다!
“이따 보자, 도운아!”
부드럽게 미소 지은 델시아가 응접실을 나서고 나서야, 나는 내내 등지고 있던 백이강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충 보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으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심신이 잔뜩 뒤틀린 상태였다.
“저런 얼굴이 취향인가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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