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싫지 않다고 말하는 그의 단호한 어투가 귓가에 웅웅, 어지럽게 맴돌았다.
그 탓인지 어설프게 안겨 있던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픈 사람은 다 어린애가 된다더니, 갑자기 애처럼 구네. 솔직히 아플 때 위로 못 받으면 서럽긴 하지…….
지금은 그냥 좀 받아줄까.
“알았어, 안 갈게. 그러니까 이것 좀 놔봐. 너 물수건 좀 치우게.”
“별걸 다 했군.”
제 이마 위에 물수건이 있는지조차 몰랐는지, 백이강은 뒤늦게 깨달은 표정을 짓고는 그제야 나를 놓아주었다.
그러더니 그는 기다란 눈매를 가늘게 휜 채로 내 행동을 가만히 응시했다. 종종 날아드는 까칠한 말은 덤이었다.
가끔씩 나른하고 사람 냄새 나는 백이강의 모습을 보며 그가 흑막이라는 사실을 잊어갈 때면, 그는 꼭 이런 식으로 내 물렁물렁한 정신을 두들겨 잡곤 했다.
참 나…… 이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되거든. 이 사회성 없는 황태자 전하야.”
“넌 날 지킬 의무가 있어. 그러니 이건 고마운 게 아니라 당연한 거다.”
“내가 너 그 말 할 줄 알았다.”
간간이 잔기침을 흘리는 나약한 환자 주제에 꼬박꼬박 지지 않고 대답하는 백이강의 낯빛은 그 기세와는 달리 여전히 창백했다.
무슨 늦여름 감기를 죽을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심하게 앓네. 두 번 걸렸다가는 아주 입원할 기세야.
보아하니 조금 아픈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와중에도 꾸역꾸역 정신을 붙들고 있는 걸 보면 대단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그냥 아프니까 간호해 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편할 텐데, 백이강의 성격상……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
“그만하고 이리 와.”
백이강은 허망하게 저를 바라보는 나를 흘기며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지금 나한테 감기 환자 옆에 누우란 소리야? 혹시 감기가 뭔지 모르는 건가? 아주 병 옮기려고 작정했네, 작정했어.
어차피 나는 백이강 옆에 누울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내가 누울 자리가 없다.
그것들이 이불 속에 가득 차 있는데 내가 어떻게 눕…….
……잠시만.
설마 백이강, 지금 내 방에서 자려는 거야? 딜…… 그걸로 가득 찬 이 정신 나간 침대에서?!
미친, 절대 안 돼, 그런 일만은 절대 일어나선 안 돼!
“정신이 들었으면 네 방으로 가. 거기가 더 넓고 편하잖아. 잘 거면 네 방에서 자.”
“됐으니까 와.”
“아니, 잠깐, 안 돼! 이불 들추면……!”
휘익!
차마 말릴 새도 없이 백이강은 순식간에 이불을 홱 들췄다.
이윽고 절대 듣고 싶지 않은,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거세고 묵직한 소음을 내며 방을 울렸다.
우르르…….
“안 된다고, 들추면…….”
진짜 x같네…….
정말이지 잔혹한 정적이었다.
이불 속에서 와르르 쏟아져 내린 그것들을 본 백이강에게서는 야속할 만큼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으라고…….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아니야.”
백이강의 입이 열리자마자 나는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혐의를 극구 부정했다.
백이강, 그거 아니야. 네가 뭘 생각하든 그거 아니라고!
“내가 네 취향을 미처 몰라봤군.”
“아니, 아니라고! 어떤 미친놈이 그냥 내 방문 앞에 갖다 놓은 거야!”
난 아무 죄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