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이강은 다른 날과 달리 묘한 개운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이윽고 묵은 피로가 미약하게나마 가셨음을 인지했다.
더없이 낯선 감각이었다. ‘잠’이라는 행위를 통해 피로를 푼다는 건 이런 걸 두고 말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도운의 도움으로 여러 번 잠들었으나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부스럭.
문득 곁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척에 고개를 돌린 이강은 시야에 들어차는 낯익은 장면을 마주하곤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휘었다.
제 옆에서 침대 시트에 얼굴을 박고 잠든 도운의 뒤통수를 빤히 내려다보던 이강은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쓰담.
부들부들한 갈색 머리카락이 마치 강아지 털처럼 보드랍게 그의 손가락 사이를 누볐다.
꽤 깊게 잠들었는지, 도운은 이강이 계속해서 머리를 쓰다듬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청도운, 너도 여기서 자.’
‘됐네요. 내 방 두고 뭐 하러? 지금까진 네가 안 자니까 여기서 잤지만, 이젠 아니잖아. 그러니까 난 내 방에서 잘 거야.’
어제만 해도 같이 안 잘 것처럼 단호하게 굴더니 결국 옆에 와서 잠든 걸 보면 이곳이 편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야지. 일부러 방에 안 보내고 이곳에서 재운 게 며칠인데, 이제 와서 본인의 방이 더 편하다고 한다면 썩 고까울 듯했다.
“뭔가 꾸미고 있는 모양인데.”
어쨌거나, 오늘 아침이 평소와 다른 걸 보면 확실히 도운이 뭔가 작정하고 일을 진행 중인 듯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최근,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고 있는 3황자와 관련이 있을 테다.
그 둘이 만나서 뭘 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림자들이 전한 말에 따르면 그냥 대화 좀 나누다가 이상한 놀이(?)를 하는 게 전부라고 했다.
따로따로 목격담을 전하는 것들이 하나같이 같은 소리를 해대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악수를 한다거나, 어깨동무를 하며 까르르 웃는다거나…….
그게 전부 술에 취해 그런다는 게 문제지만… 아무튼.
잘은 모르겠지만 크게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는 게 이강의 결론이었다.
3황자인 이안이 속을 알 수 없는 놈인 건 맞지만 2황자인 피엘처럼 욕망으로 가득한 편은 아니었다.
그 무른 성정으로 권력투쟁에 뛰어들 일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 그런 깨끗한 면이 단순한 청도운과 죽이 잘 맞는 듯 보였다.
도운의 허리춤에 내려가 있던 이불을 목까지 올려준 이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은 이강은 늘 그렇듯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려다, 목이 뻐근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움직임을 멈췄다.
더없이 생경한 감각이었다.
감히 내게 이런 변화를 준 것이 고작해야…….
이강이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침대 시트에 코를 박은 채 엎어져 자고 있는 도운이 보였다.
…저 바보라니.
저 푼수 같은 모습을 본다면 아무도 도운을 수준 높은 황실 마법사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다.
그런데 그런 바보가 싫지 않은 것도 퍽 우스운 일이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바보 같은 놈을 경멸하는 게 바로 백이강, 본인이라는 걸 그 스스로 잘 알고 있는데 말이다.
물끄러미 도운을 바라보던 이강은 이내 침실을 나섰다.
“전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아셀이 기다렸다는 듯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표정이 영 심상찮은 것을 보아,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듯했다.
그를 본 이강의 낯빛이 슬그머니 어둑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까지 밤중에 일어난 중요한 일을 이강이 모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잔다고 한들, 지금까지는 진짜 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도운의 눈에는 진짜 자는 걸로 보였겠지만.
그런데 오늘은 정말로 잠드는 바람에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건 퍽 곤란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