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으, 허리야. 아이고.”
“약한 소리 하긴.”
뚜둑, 멀쩡한 고관절이 비틀리는 살벌한 감각에 끙끙 앓았더니, 백이강이 내 신음을 비웃고는 휘적휘적 나를 지나쳐 집무실로 들어섰다.
저, 저! 내가 누구 때문에 허리가 아픈데, 저 싸가지가 진짜!
“전하, 오셨습니까.”
세상에, 깜짝이야.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퀭한 얼굴의 필립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겉은 평소처럼 깔끔하지만 자세히 보면 피부가 귀신처럼 창백하고, 눈은 탄 고기처럼 시꺼먼 것이 그야말로 좀비의 얼굴이었다.
안 그래도 <파국의 이니시아> 세계관에서 보기 드문 까만 눈이라 더 눈에 띄는데, 이렇게 보니 유난히 안쓰러워 보였다.
잠을 못 잔 건가? 야근……? 아니, 이건 야근도 아니지. 그냥 밤을 새운 것 같은데.
“필립, 설마 여기서 밤새운 거예요?”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의심을 담아 점차 흐릿해지는 내 추궁에, 필립은 끝내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가만 보면 필립도 거짓말에는 재능이 없는 것 같다.
“전하, 여기 사흘간 이어질 축제의 계획표와 예산 정리안입니다. 각국에서 오신 귀빈 리스트는 그 아래에 있고…….”
한번 입을 열기 시작한 필립의 보고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밤을 어찌나 알차게 새웠는지, 두툼한 서류철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마지막으로 노텔드 산맥 광산 사업 계획 수정안까지, 오늘 처리해 주시면 됩니다.”
“……오늘?”
이번 일은 백이강이 생각해도 좀 많긴 한지, 그의 보랏빛 눈 위로 잠시간 막막한 빛이 까맣게 일렁였다.
“예. 특히 광산 사업 건은 급한 사안이라 오전 중에 검토 부탁드립니다. 에툴담 백작이 답을 밤늦게 주는 바람에 일정이 늦어졌습니다.”
“그 작자가 게으르긴 해도 답이 늦을 인간은 아닌데. 뭐 하다가 그렇게 됐지?”
백이강의 날카로운 물음에 필립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간 뜸을 들였다.
그도 잠시, 필립은 별수 없다는 눈으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파티를 즐겼다고 합니다.”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그 새끼 지하 감옥에 처넣어라.”
“예.”
텅 비었던 백이강의 책상 위는 어느새 하얀 종이들로 꽉꽉 메워져 있었다. 업무를 꽤 많이 끝낸 것 같던 필립의 책상도 다를 바는 없었다.
여기서 비어 있는 책상이라곤 내 거 하나였다. ……그래서일까, 뜨거운 시선이 나를 향한 것은.
“……그리고 청도운 님.”
“어, 저요?”
“이곳에 계신 이상 협조 부탁드립니다.”
필립은 상냥한 웃음을 머금고는 양손에 두둑한 서류철을 든 채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섬뜩한 모습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자, 잠깐만요, 필립. 저는 이곳에 자의로 온 게 아닌데요! 그리고 마법사는 본디 체력이 약하거든요? 존중 부탁드립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손을 내젓기 시작했다. 오지 마, 썩 꺼져!
“괜찮습니다. 청도운 님은 책사시니까요.”
“음, 믿음직한 책사지.”
필립의 말에 가만히 있던 백이강까지 한마디를 거들었다.
야, 이……! 혼자 죽을 수는 없다 이거냐? 악마 일자리 탈취범이 여기 있네!
“……님들, 책사가 뭔지 모르죠.”
쿵, 내 책상 위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낸 서류철이 넓던 시야를 단숨에 가렸다.
이제 내 눈앞에는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로다’라는…… 서글픈 구절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걸 두고 ‘노예’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이 새끼들아, 이건 책사가 아니라고!
이후, 당연한 소리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흘 내내 책사고 나발이고 풍성한 서류 더미에서 개처럼 굴렀다. 물론 필립과 백이강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