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음산한 붉은빛 조명이 짙은 분노로 흩날리는 백금발 위로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창밖으로 부서지는 새하얀 새벽 달빛처럼 번득이는 백금안은 날카롭게 제 앞의 검은 인영을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저하. 몇 번이나 수색했지만 정말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흔적조차 없었다, 이 말이지.”
“예…….”
죽을죄를 지었다는 양 한껏 몸을 수그린 든든한 근육질의 사내가 눈만 보이는 흑의를 뒤집어쓴 채 반갑지 않은 결과를 보고했다.
“쯧, 쓸모없는 것들. 썩 꺼져.”
짜증스레 뱉어지는 말이 허공을 거세게 강타했다. 그러자 처음부터 없었던 듯, 아랫것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이윽고 피엘의 빛나는 백금안에 깊은 어둠이 깔렸다.
“켄 베르도, 네놈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나를 배신해……!”
으득, 입술 새로 새어 나오는 스산한 잇소리가 고요한 2황자의 집무실 내부를 느리게 채워 나갔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기다리면 형님의 비밀을 손에 쥘 수 있었는데!”
쾅-!
다시 한번 통탄의 주먹질이 애꿎은 집무실 책상 위를 내려쳤다.
피엘이 기사단장인 켄을 회유해, 그를 제 형님이자 황태자인 하일의 개인 호위로 집어넣어 뒤를 캐기 시작한 지 어언 4년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켄이 저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럴 때를 대비해 인질로 잡아둔 켄의 가족들마저 흔적도 없이 제국 땅에서 모습을 감췄다.
집은 물론이고, 마당, 하다못해 저택 주변에 심어진 풀꽃들까지도 일체 사라졌다는 황당한 첫 보고를 받았을 때는 어이가 없어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그 무식하게 크기만 큰 귀족가의 저택 하나가 하루아침에 통째로 사라졌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하여, 피엘은 제 심복들이 분수도 모르고 심심한 농담을 던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정말이었다니.
“마법사의 소행이군.”
최근 국경을 오간 자들의 명단을 받아 전부 일일이 확인해 보았지만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훑어봐도 켄의 집안인 베르도 후작가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귀족이 사는 커다란 저택을 일말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온전히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평범한 인간의 범주가 당연히 아니었다.
이것은 필히 ‘마법’의 영역이었고, 규모로 보았을 때 어지간히도 강한 마법사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컸다.
결국 제일 아니길 바랐던 마법사의 소행이라 결론 내린 피엘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헝클였다.
오랜 시간 고대하던 일의 성사가 마침내 코앞에 다가온 참이었다.
그런데 이리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던지라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곧 건국제야. 이대로 멍청히 형님의 황관을 지켜볼 순 없어.”
얼마 뒤면 4년마다 돌아오는 펜디움 제국의 대규모 건국제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세워둔 계획의 핵심 인물인 켄을 놓친 피엘에게는 두 번은 없을 절호의, 그리고 마지막 기회가 직전까지 닥친 위기 상황이었다.
이 개 같은 상황을 어찌할까. 두 눈을 감고 고뇌하던 피엘은 퍼뜩 뇌리를 스치는 어떤 것에 튕기듯 도로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형님께서 이번에 새로운 ‘개’를 들이셨다지.”
피엘은 천천히 사고를 이어가며 상황을 짜맞춰 보았다.
듣자 하니, 그 ‘개’는 신원이 불분명한 자인데 어느 날 갑자기 황실 마법사가 되었다고…….
처음 아랫것에게 이에 관한 보고를 받았을 때는 잠깐 지나가는 바람이겠거니, 하며 별생각 없이 넘겼던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스친 감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고 속삭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