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모든 술이 다 있는 것 같아요.”
레지와 내가 안쪽으로 들어서자 홀라당 사라졌던 벽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꼼짝없이 갇힌 것과 같았다. 여기라면 아무리 날고 긴다는 그림자라도 내가 뭘 하는지 모를 듯했다.
신기하네. 황궁에 이렇게나 완벽하게 밀폐된 공간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 다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런데…… 이 완벽한 공간에 딱 하나가 없어.”
스산한 음성이 낮게 깔렸다. 그와 동시에 처음 보는 레지의 낯선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암울해 보이기도, 또 울적해 보이기도 했다.
“뭔데요?”
“황태자 전하께서 즉위식 날 선물 받으신 제국력 1,107년산 포도주. 그게 있어야 완벽한데.”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낯을 한 레지는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저장고 한가운데에 있는 공석이 눈에 들어왔다.
다 채워져 있는데 그곳만 비워져 있으니 그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뭐, 이건 됐고. 3황자 저하께 드릴 거라면 사과주가 좋을 거야.”
그러기도 잠시, 레지는 금세 우울한 얼굴을 지우고 평소처럼 텐션을 올렸다. 그러고는 저장고 가장 상단에서 까만 와인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포도주가 아니라요?”
“사과주가 딱 마니아층을 위한 애증의 술이거든. 한 번도 안 마셔봤어?”
“으음, 네.”
“마셔볼래?”
아직 가타부타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레지는 벌써 어디서 난 건지 모를 빈 잔에 사과주를 꼴꼴꼴 따르고 있었다.
저 재킷 안에 빈 잔을 들고 다니는 건가? 갑자기 빈 잔이 어디서 저렇게 나오는 거람.
열린 입구를 통해 꿀렁꿀렁 흘러나오는 투명한 액체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사정없이 찔렀다.
꼭 레몬즙을 마신 것처럼 혀끝에 새콤달콤한 입맛이 감도는 게 느껴졌다.
으음, 딱 한 잔 정도면 괜찮지 않으려나?
“자자, 어서 마셔봐. 장난 아니라니까.”
레지가 건네는 술잔을 무심코 받으려던 그때였다.
‘레지 님이 건네는 술은 절대 드시지 마세요. ‘밀폐된 공간’, ‘레지’, 그리고 ‘그분이 건넨 술’. 이렇게 세 가지 항목이 겹치면 꼭 사달이 일거든요.’
빠르게 머릿속을 스치는 안나의 경고가 잠시간 멍해졌던 정신을 차갑게 일깨웠다.
“지금은 괜찮아요. 바빠서.”
받으려고 쭉 내밀었던 손바닥을 급히 무른 나는 단호하게 잔을 거절했다. 그러자 레지는 딱히 들러붙지 않고 아쉬운 얼굴로 잔을 거뒀다.
하마터면 ‘네!’ 하며 받아먹을 뻔했네. 넘어가지 않게 조심해야지…….
레지가 내민 사과주에는 ‘999’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더불어 겉 포장지가 금박으로 뒤덮인 것이, 이쪽 세상의 술에 대해 잘 모르는 내 눈에도 상당히 귀해 보였다.
“값은 치르겠습니다.”
“아냐, 됐어.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져♡”
“우리 사이니까 따져야 합니다.”
매정한 말과 함께 금화 꾸러미를 꺼내 들자 레지가 알았다며 다급히 항복 자세를 취했다.
“야박하게 구네. 뭐, 그런 점도 좋지만! 아무튼 그냥 가져가. 흔해 빠진 사과주쯤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후후, 하며 음흉하게 미소 지은 레지는 백이강에게도 가져다주라며 다른 포도주를 하나 더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네 선물은 나야♡ 혹시 먹고 싶은 술이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
“와, 정말요? 감사히 거절하겠습니다.”
“쳇.”
이제 볼일은 다 끝났다.
여기서 나가면 포도주는 아셀에게 건네주고, 이안에게 가서 사과주를 준 다음 접촉으로 신성력을 뽑아먹으면 오늘 일과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