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고요한 집무실에 자그마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필립이 문을 열자 안나가 들어와 이강의 책상 앞에 섰다.
“전하, 청도운 님께서 조금 전에 잠드셨습니다.”
이강의 눈이 탁상 위의 시계를 향했다. 째깍째깍, 열심히 돌아가는 시침이 오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에는 밤이 늦어서야 겨우 잠들곤 했으니 꽤 이른 시각이었다.
“오늘 한 거라곤 이안을 만난 것뿐이지 않나? 시간이 이른데.”
“그렇습니다만… 오늘은 다른 날보다 좀 더 피곤해 보이셨습니다.”
안나는 멍한 얼굴로 이안의 방에서 나오던 도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도운은 황태자궁에 도착하기까지 계속 얼빠진 얼굴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이윽고 침실이 조용해진 것을 확인한 안나는 그길로 곧장 이강에게 달려온 것이었다.
잠시간 말이 없던 이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필립, 뒷정리해라.”
“예, 전하.”
이강은 책상 위의 서류를 흘긋 바라보며 필립에게 명했다.
‘오늘도 야근 확정이군.’
필립은 영혼 없는 눈으로 부드럽게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문으로 가는 이강의 뒤를 아셀과 안나가 따랐다. 그러자 이강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침실로 간다. 너희도 이만 돌아가.”
웬일로 일찍 업무를 마치나 했더니, 도운에게 가는 모양이었다. 그를 깨달은 아셀과 안나는 말없이 허리를 굽혔다.
쿵.
이내 집무실의 문이 닫혔다.
이강이 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안나는 이강의 기척이 점차 멀어지고, 곧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요새 두 분,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딱히 누군가를 바라보며 답을 종용한 건 아니었으나, 자연스럽게 곁에 있던 아셀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셀 경, 진짜 모르겠어요? 전과 달리 전하께서 묘하게 더 도운 님을 신경 쓰시는 것 같은데요…. 오히려 도운 님이 시큰둥해 보이고요. 예전엔 반대였던 것 같은데.”
고심 속에 흘러나온 안나의 말에 아셀 또한 덩달아 푸른 눈을 진중하게 빛냈다.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모호한 표정을 보이던 아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선 늘 도운 님을 신경 쓰고 계십니다. 다만 티를 내지 않으시니 도운 님이 모르실 뿐입니다.”
“그거! 바로 그거예요, 아셀!!”
그러자 안나가 흑요석 같은 까만 눈을 무섭게 번득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예? 뭐, 뭐가 말씀입니까?”
“그게 문제라고요! 전하께선 티를 안 내시잖아요! 그런 건 티를 내야 하는데 말이죠. 특히나 도운 님 같은 물렁한 타입은 더더욱요.”
‘…물렁?’
안나의 말에 아셀의 눈이 당혹스럽게 일렁였다. 같은 주제로 말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 속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를 드러냈다가는 안나가 한심하게 바라볼 것이 뻔했다.
분명 애인을 서른 명이나 사귀었으면서 이런 것도 모르냐고 할 거다. 아직 듣진 않았지만 벌써부터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결국 아셀은 알아들은 척하며 슬그머니 맞장구를 쳤다.
“역시 그렇죠? 그럼 이제부터 제 말 잘 들어요, 아셀. 전하의 심복으로서 이대로는 안 돼요. 지금부터 저희가….”
이윽고 잔뜩 흥분한 안나의 목소리가 이러쿵저러쿵, 난해한 ‘대작전!’ 같은 말들과 함께 귓가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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