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저게 뭐야?!”
갑자기 저게 뭐냐고!
당황한 나는 백이강이 손을 놓은 줄도 모르고 기겁하며 뒷걸음질했다. 빙의 이래 본능적으로 물러선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새붉은 노을빛에 물들어 아름답던 정원은 순식간에 거뭇한 어둠에 잠겨 보이질 않았다.
“…때가 됐군.”
어둠 속, 백이강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눈에 비쳤다.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린 그는 나와 달리 앞으로 나아갔다.
때가 됐다니,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집무실에서도 저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나?
‘그래, 나가지. 슬슬 때가 된 것 같군.’
그거… 난 그냥 산책할 때가 된 것 같다고 한 줄 알았는데, 다른 뜻이었다고?
“백이강, 저게 뭔지 알아?”
전혀 놀라지 않는 백이강은 이 사달이 날 것임을 진즉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일도 다 끝난 마당에…!
이윽고 폭풍우가 몰아치듯 거센 바람이 들이닥쳤다. 단단한 기압에 밀리지 않도록 힘을 주어 버티고 서 있는데, 그 정신없는 와중에 백이강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귓가로 날아들었다.
“악마다.”
이보다 간결하고 정확하며, 간단할 수는 없었다.
“농담하지 마, 이런 상황에!”
쟤가 진짜 미치기라도 했나? 갑자기 악마가 왜 튀어나와?! 악마는 네가 아니라 피엘과 관련이…!
-하일 데르지오, 계약자여. 약속한 보상을 받으러 왔다.
일순, 소름 끼칠 만큼 섬찟한 음성이 고막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그저 말하는 것을 들었을 뿐인데 마치 살얼음을 귓구멍에 처박는 듯한 생경한 감각이 들었다.
직접 듣고 나니 백이강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건 악마가 맞다.
악마의 목소리를 이렇게까지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지만, 원작에서 이안과 그의 동료 앞에 악마가 등장하던 순간과 모든 상황이 완벽히 일치하니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까맣게 물드는 하늘과 시야를 차단하는 상당한 암흑, 그리고 ‘계약자여’라는 명료한 대사까지. 악마의 등장이 아니라면 이 모든 현상을 설명할 길은 없었다.
“약속한 보상이라니… 저게 무슨 소리야, 백이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백이강이 나를 돌아보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눈이 감기니 다른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오직 백이강에 한해서.
“악마에게 널 받는 대신, 영혼을 주기로 했다.”
“야… 내가 농담은 그만하라고 했을 텐데?”
“농담 아냐.”
백이강이 너무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여서일까, 덩달아 나까지 현실 감각이 생기질 않았다. 이게 다 꿈같고, 눈을 뜨면 깨어날 것만 같았다.
이곳이 아무리 판타지 소설 속이라지만 목숨이 걸린 일에까지 그런 설정을 적용해서 놀라지 않기는 퍽 어려운 일이었다.
애당초 영혼이니 뭐니, 그런 소리에 담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이건 아무리 꿈이라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엔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그럼 내가 여기 온 게 악마 때문이라고? 그것도 너와 악마가 한 거래 때문에?”
“그래서 널 처음 봤을 때 물었지 않나. 마계에서 온 자냐고.”
이번에도 건조한 목소리가 담백한 대답과 함께 돌아왔다. 그러자 잊고 있던 과거의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설마 마계에서 온 자인가?’
당시, 나는 퍽 진지하게 들리는 백이강의 물음에 황당해하는 웃음을 터뜨렸었다. 이제 보니 그 물음에 이런 어이없는 속뜻이 담겨 있었구나.
악마가 보낸 사람이냐고 묻는 것이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고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었다. 원작에서 백이강이 악마와 계약하는 건 타락한 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