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가면 되겠군.”
“응? 어딜.”
“가야 할 곳.”
어두컴컴해진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백이강이 보랏빛 눈을 환하게 빛내며 다시금 내 손을 붙잡았다.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곰 인형을 다른 손으로 끌어안은 채, 나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는 군소리 없이 그를 따른 것을 빠르게 후회하게 된다.
“잠깐, 잠깐…… 좀 천천히…… 헉, 헉…….”
“청도운, 체력이 왜 그따위야? 이 정도로 심했던가.”
“뭐야? 너 지금 나더러 그따위라고 했…….”
말하는 것도 숨이 차서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 몰라. 그따윈가 보지. 내 체력은 그따위야.
“돌아가면 보약이라도 먹여드려야겠군.”
“시끄러워, 씨…….”
“업어줄까.”
“닥쳐.”
쿡쿡 웃는 백이강의 웃음소리가 따갑게 고막을 울렸다. 망할 백이강, 저렇게 매사에 재수 없기도 재능이다, 진짜.
그래도 백이강은 늘어지는 나를 꾸역꾸역 데리고 계속해서 위로 올랐다.
백이강이 날 데려간 곳은 높디높은 산맥…… 처럼 느껴지는 한 언덕이었다.
분명 아래에서 볼 땐 별것 아닌 것 같았는데 막상 오르고 보니 엄청나게 경사가 높았다.
심지어 꼭대기까지 엄청 멀어! 산도 아니고 언덕 주제에!
“이제 다 왔으니까 정신 차려.”
“보통은 그 뒤에 힘내라는 말이 붙거든?”
“흠? 그건 당연한 거고.”
“아오, 진짜.”
망할 백이강!
속으로 몇 번을 더 씹은 뒤에야 백이강의 걸음이 멈췄다. 드디어 끝이냐? 끝인 거야?!
달뜬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자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이 듬성듬성 보였다.
“이리 와.”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백이강을 따라 앞쪽으로 조금 더 자리를 이동했다.
내가 하도 끙끙대니 보기에 안쓰러웠는지, 백이강은 급기야 내 허리를 틀어쥐고 앞으로 이끌었다.
“……헉.”
마침내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말문이 막혔다. 어쩐지, 꽤나 높은 곳까지 올라온다 싶더니 이런 광경이 나타날 줄이야.
눈앞이 온통 아름다운 불빛으로 가득했다.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었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야경이었다.
“이곳은 황성이 전부 내려다보이는 몇 안 되는 장소지.”
백이강의 나른한 목소리마저 하나의 배경이 되어 흩어졌다.
그의 말마따나 황성은 물론이고 여러 마을도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수도 전체가 내 앞에 팔을 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백이강은 언덕 끝자락에 자리를 잡고 편하게 앉았다. 그를 따라 곁에 앉으니 비명을 내지르던 근육통이 조금 잠잠해졌다.
까만 밤하늘에 뜬 초승달은 눈부시게 반짝였고, 그 주변의 별들은 앞다투어 찬란하게 빛났다.
그 아래로는 축제의 들뜬 불빛들이 알록달록 따스한 빛을 뿌리는 것이, 꼭 봄날에 흐드러지게 핀 꽃밭 같았다.
절경 그 자체였다.
“와…… 올라오는 길이 꽤 험하던데, 여긴 어떻게 알았어?”
“어렸을 때 종종 왔어. 나도 여길 다시 온 건 꽤 오랜만이고.”
부드럽게 답하는 백이강의 눈동자 너머로 반짝이는 불들이 윤슬처럼 일렁거렸다.
비현실적인 장면이 뇌리에 박혀서인지 그마저도 신비롭게 보였다.
“갈 데라는 게 여기야?”
뭔가 다른 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심에 나온 질문이 아니었다. 정말로 이렇게 멋진 곳을 내게 보여주려고 한 게 맞느냐는 물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