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셀과 필립을 물린 이강은 도운의 침실 앞에 우두커니 섰다. 안쪽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리 조용한 걸 보면 아직까지 술을 마시는 건 아닌 것 같고.
코를 고는 타입도 아니다 보니 지레짐작하긴 어려웠지만 잔을 기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도운은 지금…….
“자는군.”
술기운에 취해 결국 잠든 게 분명하다.
판단을 마친 이강은 곧바로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중앙에 놓인 테이블 소파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도운의 모습이 보였다.
도운은 예상한 바를 그대로 보여주는 빤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었으나, 이강은 그런 도운이 싫지 않았다.
다른 놈이었다면 질린다는 이유로 진즉 내다 버렸을 테지만, 도운은 그런 결 따위로 비교할 게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는 비워진 잔과 술이 반쯤 담긴 술병 하나가 말끔하게 놓여 있었다.
다른 빈 병은 안나가 전부 치운 것 같지만, 그걸 감안해도 많이 마신 것 같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겨우 한 병 정도.
“고작 한 병으로 취했을 리는 없고.”
이강의 말이 끝나자 눈치껏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3황자의 방에서 잠시간 머무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곳에서 먼저 술을 드신 것으로 파악됩니다.”
“청도운을 놓친 네놈들이 목격한 것은 아닐 테지. 출처는?”
그림자의 말에 이강의 눈썹이 마뜩잖게 일그러졌다.
그들이 명을 어긴 것이 아니라 도운이 빠져나간 것이다 보니 더 마음에 안 들었다.
“3황자의 그림자입니다. 진위를 확인할까요?”
“됐다. 그놈들이 이깟 일로 거짓을 고할 이유는 없지. 물러가라.”
“존명.”
그림자가 사라지자 다시금 적막이 찾아왔다. 방 안에 감도는 달콤한 소다 향이 은은하게 남아 이강의 코끝을 스쳤다.
사실 도운을 ‘놓쳤다’라고 말하기는 곤란했다.
황궁 전체가 이강의 손아귀 안이고, 그의 눈이 모든 곳에 자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도운이 어디서 뭘 하는지, 누굴 만나는지. 이강이 모를 수는 없었다. 아무리 순간 이동을 해봐야 결국 황궁 안이지 않은가.
“이런 것까지 말하면 싫어하겠지.”
그 며칠 좀 가둬놨다고 온갖 성질을 부리는 놈인데, 단순히 그림자만 붙여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 더한 짜증을 부릴 것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물론 그게 다겠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어쩜 그럴 수 있냐며 화내거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지만, 청도운은 그냥 그럴 줄 알았다며 잠깐 짜증 내고 말 것이다.
이강은 도운이 엎어진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반쯤 남은 술병을 들어 올려 빈 잔에 따르자 찰랑이는 투명한 액체 위로 창밖의 달이 담겼다.
“더럽게 달군.”
잔은 금세 비워졌다. 눈앞에 더없이 적절한 요깃거리가 있으니 안주가 필요 없었다.
도운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정수리에 있는 뾰족한 머리카락 하나가 들썩였다.
이강이 그를 쓰다듬자 잠시 아래로 내려가는 듯하던 그것은 다시 뾱 하고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넌 내가 아니어도 되겠지.”
도운은 원하는 것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누가 쥐여 주든, 아마 상관없겠지.
“난 아닌데.”
그 또한 원하는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주는 이가 누구든 상관없지만, 이강이 생각건대 그건 도운이 아니면 줄 수 없다. 아마 분명 그럴 것이다.
원래 원하는 것은 조금 거리를 두고 봐야 한다. 그래야 진정 바라는 것인지 아닌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철칙이 유독 도운 앞에서는 힘을 잃었다.
거리 따위 없으면 좀 어떤가.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을 쥐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의미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