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장을 나서자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필립이 다소 초조한 얼굴을 한 채 급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전하, 황녀가 거의 도착했다고 합니다.”
필립의 말에 백이강이 슬그니 미간을 좁혔다.
“일찍도 왔군.”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예정보다 회의가 길어졌는데, 필립이 용케도 그 시간을 틈타 알아서 준비를 끝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 마침 저기 오네요.”
무언가 말하려던 필립이 반대편 복도를 바라보며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그를 따라 눈을 돌리자 저 멀리서 안나와 아셀이 서둘러 오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황녀께서 근처시라 하여 급히 끝내고 왔습니다.”
두 사람도 황녀가 생각보다 더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시험을 끝내고 온 듯했다.
회의는 늦게 끝나고 황녀는 일찍 왔으니 이보다 최악의 타이밍은 없을 터였다.
“도운 님, 고생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전하의 호위는 제가 맡겠습니다.”
아셀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백이강의 뒤에 섰다. 안나도 금세 내 옆으로 다가와 자리를 지켰다.
으음, 내가 한 거라곤 백이강의 뒤에 서서 멀뚱히 회의를 구경한 게 다지만….
새삼, 매번 그런 살벌한 분위기를 견디는 아셀이 못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안나, 너무 일찍 온 거 아니야? 저녁에 온다더니… 아직 시간이 꽤 남았는데.”
“황녀께서 벌써 성문을 넘었다고 하셔서요. 시험도 어느 정도 끝난 참이라 빠르게 마무리하고 왔답니다.”
안나의 말과 함께 시종들이 황궁 이곳저곳을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덕분에 슬슬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진짜로 황녀가 오는구나. 원작에서 피엘에게 죽임당했던 그 황녀가….
이번에는 피엘이 황태자가 아니라서 어떨지 모르겠네. 하지만 백이강이 애꿎은 사람을 이유도 없이 죽일 것 같진 않았다.
백이강 일에 방해가 되면 몰라도…. 우선은 지켜봐야겠지.
“만찬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겉옷만 갈아입고 바로 가시면 됩니다. 도운 님도 좀 더 밝은 옷을 입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필립은 능숙하게 백이강과 내 복장을 체크하며 자연스레 의상실로 향했다. 시간이 없다더니, 그 와중에 옷은 또 중요한 모양이다.
“근데 저도 가나요? 이제 호위도 아닌데.”
“당연합니다. 도운 님께선 황실 마법부를 대표하는 마법사시니까요. 황녀의 환영 인사로 더할 나위 없는 인재십니다. 수장께서 외근 중이기도 하시고요.”
내 물음에 필립이 또박또박 가볍게 답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수장이 없는 지금으로서는 블루나 레지보단 내가 대표로 나서는 게 나은 것 같다.
필립, 아셀, 안나가 뒤를 따르는 채로 우리는 다 함께 의상실에 도착했다.
역시 이렇게 다들 함께 있으니까 든든하단 말이지.
이후,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백이강과 나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연회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회의를 오늘 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촉박하진 않았을 텐데.”
“전하께선 시간이 비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니까요. 그래도 오늘은 나름 넉넉한 편이었답니다.”
백이강 몰래 입을 삐죽이며 불만을 뱉자, 곁에 있던 안나가 배시시 웃으며 작은 소리로 답했다.
“다들 모여 있겠지?”
“그럴 겁니다. 두 나라가 한데 모여 미래를 논하는, 굉장히 영광스러운 자리니까요.”
주어가 불분명했지만 그를 눈치껏 알아들은 안나가 간단히 수긍했다.
곧이어 연회장 앞에 도착하자,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백이강을 보며 허리를 숙인 뒤 문을 열었다.
가장 상석에 황제가 있고, 그 주변으로 펜디움의 귀족들과 이틀 전에 미리 왔던 아르테의 외교 대신들이 자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