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하게 정곡을 찌르는 켄의 말에 잠깐 사고가 정지했다.
‘저더러 ‘배신자’라고 말씀하셨던 그날이요’라니…… 내가 그랬나?
아닌데, 난 그때 켄을 배신자라고 생각만 했…… 음, 말로도 했던가?
그러고 보니 생각한다는 게 그만 말로 튀어나왔던 것 같기도…….
“으흠, 그랬던가…… 기억이 잘 안 나네.”
안 나기는 개뿔, 방금 막 선명하게 기억났다.
‘와, 배신자 켄이잖아?’
‘……뭐?’
‘아, 미안. 아직 비밀이지?’
심지어 그때 당시 날 보던 켄의 지진 난 갈색 동공까지도 똑똑히 머릿속에 떠올랐다.
찬찬히 눈을 굴리며 켄의 시선을 피한 나는 간절한 눈으로 백이강을 슬쩍 바라보았다.
백이강, 너 뭐 해? 그렇게 보고만 있을 거야?! 나 지금 위기인 거 안 보이냐고!
“켄, 그만 나가봐라.”
“……예, 전하.”
내 복잡한 눈빛을 정말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백이강이 설핏 입꼬리를 올리며 넌지시 켄의 심문을 막았다.
시원하게 대답을 듣지 못한 켄은 상당히 아쉬운 눈치였지만 차마 더 말을 붙이지 못한 채 섭섭한 얼굴로 집무실을 나갔다.
당분간은 켄을 피해 다니는 게 좋겠다. 가만 보면 쟤도 은근히 집착이 심한 편이라니까.
“청도운, 이번에는 내가 묻지. 네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는 동상이 파괴된 후에 어떻게 됐지?”
날아드는 물음에 나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마셨다. 저건 지금 나더러 앞으로 펼쳐질 1,499화 분량의 소설 내용을 줄줄 읊으란 소리였다.
“아무도 예상한 일이 아니었으니 테러에 당했고, 그로 인해 모반 세력의 몸집이 커지면서 결국 황실에서 내분이 일어났어.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의혹이 커졌거든.”
당장 사건 뒤의 일만 말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간단히 답을 뱉었다. 그러나 백이강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 후에는?”
“음…… 소란이 좀 있긴 했지만 금세 안정을 찾고 평소의 정세로 복귀했어.”
사실 원작에 따르면 그 난리 통을 겪으면서 2황자가 백이강을 몰아내고 얻었던 황태자 직위를 박탈당하는 참극이 있었다.
또한 윗물이 탁하니 아랫물도 자연히 더러워져, 제국민들 사이에서도 매일같이 질 낮은 범죄가 연이어 일어났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정리하는 게 바로 메인 주인공인 3황자다.
아무튼 썩 좋은 전개도 아닌데, 그냥 이 정도로 에둘러 말하면 되겠지? 어쨌든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니까.
어차피 원작의 사달 속에 백이강은 없다. 진즉 흑마법사가 되어 수도에서 추방당한 그는 추운 북부 지역에서 홀로 지내기 때문이다.
이후 검은 힘에 지배된 그가 등장하는 무대는 다소 한정적이었다. 그래도 존재감 자체는 흑막이다 보니 큰 편이지만…….
“넌 이 세계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처음 만났을 때 백이강이 나더러 마계에서 왔냐고 물었던가? 생각해 보면 책 속 등장인물에게는 내가 그렇게 비칠 수도 있겠네.
전지전능한 것처럼 미래를 다 알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난 신이 아냐.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그걸 너한테 말해줄 순 있지. 어쩌면 도와줄 수도 있고.”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성심껏 도와주면 고맙다는 말 좀 하라고, 이 배은망덕한 백이강 놈아.
“……그래.”
뭔가 오묘한 표정을 한 백이강은 끝내 아무 말도 얹지 않은 채 무던히 입을 다물었다.
* * *
여느 때와 같이 백이강의 집무실 소파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별안간 마법부를 관리하는 담당자에게서 마력 측정을 위해 회의장으로 와달라는 전언을 받았다.
“웬 마력 측정?”
“저는 그쪽 일은 잘 모르지만, 아마 황실에 등록된 마법사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첫 번째 관문일 거예요. 마력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그에 맞는 일을 배당받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