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언? 거기서 뭐 해요?”적막하던 공기가 가볍게 흔들렸다.
“아, 리제…….”
“무슨 일 있어요?”
발코니에서 달에 젖은 정원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킬리언은 달빛을 잘라 만든 것 같은 리제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긴. 혹시 낮에 클리프랑 싸운 것 때문에 그래요?”
“클리프랑 싸워? 내가?”
“클리프가…… 그러니까, 영지 시찰 얘기를 하면서…….”
리제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제야 킬리언은 낮에 클리프가 저를 도발했던 것을 떠올렸다.
“아아, 그런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야.”
“그럼, 뭣 때문에 그래요?”
킬리언은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리제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예전에는 리제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눈빛이 좋아서 가끔은 일부러 리제의 시선 닿는 곳에서 심각한 척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저만을 오롯이 봐주는 리제의 시선이 좋기는 했지만, 일부러 리제를 걱정시키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저 낮의 그 티타임 자리에서부터 계속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 대단한 걱정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좀 짜증 나는 일이 있어서 그래.”
“또 혼자서 끙끙 앓는다. 말해봐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잖아요.”
“네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일이야.”
빙긋 웃었지만 영민한 리제는 금방 뭔가를 눈치챘다.
“혹시…… 에디트 일이에요?”
킬리언은 대답 대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에디트가 왜요? 아직도 에디트가 그렇게 싫어요?”
“자꾸 거슬리잖아.”
“그렇게 많이 신경 쓰여요? 에디트는 킬리언 얘기도 전혀 하지 않던데…….”
그러자 킬리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내 얘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네. 저도 에디트가 킬리언 얘기하는 걸 들어본 적 없지만, 공작 부인께서도 들어본 적 없으시다면서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지으셨거든요.”
“하……!”
왠지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왜요? 에디트하고 대화하고 싶어서 그래요?”
“누가 그런 여자랑!”
뱀의 새끼다.
지금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모두의 경계심이 풀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분명 독니를 드러낼 여자다.
그런 여자와는 말을 섞기는커녕 얼굴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와…… 이런 식으로 상처를 주시네요?”
“저도 사람인걸요.”
그런데 왜 그녀가 했던 말들이 자꾸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설마, 고작 그런 일로 상처 따위를 받은 건 아니겠지?’
어차피 정략혼인 것은 그쪽도 다 알고 있다.
얻을 게 있으니 무시당하고 의심받을 걸 알면서도 저 혼자 이 루드윅 공작가에 발을 들인 대범한 여자다.
그런 여자가 겨우 까칠한 말 몇 마디 들었다고 상처를 받았을 리 없다.
‘그래, 나 찔리라고 상처받은 척 연기한 게 분명해.’
그 클리프 루드윅에게조차 겁 없이 맞서던 여자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