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겔호프 백작이 정신없는 사이에 잠깐 마실 것을 좀 가져오겠습니다. 금방 다녀올 테니, 여기서 절대 움직이지 마십시오.”
“알았어요. 고마워요, 킬리언.”
“누가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면 소리를 지르십시오. 무슨 소동이 벌어진대도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런 당부를 하고도 킬리언은 어린애를 두고 가는 것처럼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나는 혼자 서서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작지만 신경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꼴에 귀여운 척은…….”
순간적으로 킬리언을 보고 비아냥댄 건 줄 알았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니 아까 날 흘겨보던 영애와 리제 싱클레어, 그리고 다른 몇몇 영애들이 내 쪽을 보며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뭐야? 질투……? 날 질투해 주는 거야?’
세상에, 질투라니!
살면서 질투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굉장히 신선한 체험이었다.
나 자신의 무언가가 아닌, 오로지 킬리언 때문에 받는 질투였지만 이게 어딘가!
괜히 턱이 올라가고 콧대가 3mm 정도 더 높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양을 떨어서라도 살아남으려고 하겠죠. 리겔호프 백작가는 완전히 랭스턴 대공 각하 쪽으로 전향한 모양인데.”
“애초에 인질이나 다름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된 걸 보니 리겔호프 쪽에서도 버리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에요.”
어? 다들 말 안 해도 내 처지를 잘 알고 있잖아! 3단계 예외 조건을 충족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하지만 기분이 좋은 거랑 나와 루드윅가의 명예가 상하는 거랑은 다른 문제지.’
질투를 해줘서 고마우니 그냥 넘어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 바닥에서는 원래 입 다물고 있으면 호구 된다고 그랬다.
나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그러게요. 비빌 언덕도 없고, 인질이나 다름없는 신세네요.”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일단 인정은 한다.
그랬더니 다들 부채 뒤에서 조소를 흘렸다.
“저 결혼이 얼마나 갈까요?”
“젊은 나이에 이혼당하면 불쌍해서 어째요?”
조롱기와 악의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어쩌긴 뭘 어째요? 킬리언 루드윅이랑 결혼해 봤던 여자가 되는 거죠, 뭐. 별거 있나요?”
웃던 여자들이 하나둘씩 미소를 지워갔다.
“이혼하면 위자료랑 작은 저택이 하나 나온대요. 그럼 그 저택에 살면서 어마어마한 위자료나 야금야금 파먹으며 살겠죠. 그런데 제가 또 예쁘고 몸매가 좋잖아요? 그럼 괜찮은 애인 몇 두고 살 수도 있겠네요. 애인 두기 귀찮으면 재혼할 테고. 정말 별거 없네요. 그렇죠?”
그러자 레일라 싱클레어가 표독스레 쏘아붙였다.
“결국 루드윅가에 들러붙은 거머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군요.”
“어머! 그게 여러분들이 사는 방식 아니던가요? 결혼 전엔 아버지, 결혼 후엔 남편의 이름으로 건방을 떨잖아요. 그래서 저도 거기에 좀 어울려 드렸던 건데…….”
사실 그건 남자와 가문이 아니면 여자가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든 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일 테고 내가 빙의하기 전의 에디트 리겔호프도 별다르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쟤들이 날 거머리라고 욕할 처지는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그들은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지며 도끼눈을 떴다.
“우린 당신과 달라요!”
“아, 물론 다르죠. 나는 적어도 킬리언 루드윅이랑 결혼해 봤던 여자가 될 테니까. 당신들이 그렇게 선망해 마지않는, 그 남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