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줄래? 인형값은 이 정도면 되려나?”나는 지난번에 금고에 넣어두고 남은 돈 중 20만 세나를 꺼내 내밀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상황이다 보니 20만 세나나 꺼내면서도 전처럼 돈이 아깝지는 않았다. 아니면 그사이에 내가 귀족 생활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안나는 그중 5만 세나만 집어 들었다.
“이 정도만 있어도 재주 좋은 장인에게 남녀 인형 한 쌍을 주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안나에게 나머지 15만 세나를 더 주며 부탁했다.
“그럼 이걸로는 인형 옷 만들기 좋은 천이랑 바느질 도구들 좀 사다 줘. 나머지는 수고비.”
“아가씨를 모시는 게 제 일이니 수고비는 필요 없습니다.”
“왜? 나한테 뭐 받지 말래?”
“네?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안나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것만 봐도 그녀가 어떤 언질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 뭘 그렇게 긴장해? 널 매수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적은 돈이잖아. 그러니까 그냥 수고비로 받아둬.”
안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순순히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나야말로 잘 부탁해. 요새 너무 심심해서 말이야.”
사실 안나가 나를 감시하기 위해 붙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나를 흰 눈으로 보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그것만 해도 나는 그녀에게 감사했고, 거기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을 늘 갖고 있었을 뿐이다.
만약 안나가 끝끝내 내 성의를 거절했다면 오히려 더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리고 수고비 덕분이었는지, 안나는 그날 저녁에 목각 인형 한 쌍과 반짇고리, 그리고 여러 가지 천과 단추 같은 것들이 든 상자를 갖고 왔다.
“어떻게 벌써 만들었대?”
“다행히 주문자가 의뢰를 취소한 게 있었습니다.”
“운 좋았네! 이거, 진짜 잘 만들었다.”
난 투박한 나무 조각이나 떠올렸더니, 의외로 관절이 움직이기까지 하는 매끈한 목각 인형이었다.
“수고 많았어, 안나.”
“인형 옷 패턴을 구해다 드릴까요?”
“응? 그, 그래 줄 수 있어?”
“침방에 말하면 금방 그려줄 겁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안나가 묘하게 더 친절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수고비 때문인가……?
어쨌든 안나 덕분에 나는 다음 날부터 조몰락거리며 인형 옷을 만들기 시작할 수 있었다.
시작해 보고서야 기억난 건데, 난 사부작거리는 걸 좋아한 것치고는 영 손재주가 없었다.
처음에는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는 바느질에 짜증이 났지만 나는 곧 마음을 바꿔먹었다.
‘누가 평가하는 것도 아닌데 좀 못하면 어때? 나는 그저 돈과 시간을 죽여서 재미를 추구하는 것뿐이야. 그리고 이게 진정한 사치지.’
이게 사치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니 대번에 마음이 풀리면서 갑자기 한 땀, 한 땀이 재미있었다.
올이 풀리지 않게 풀을 먹여야 해서 좀 귀찮기는 했지만, 천 조각이었던 것이 입체적인 옷으로 변화할 때마다 희열이 컸다.
‘그래, 이게 취미지! 잘하든, 못하든 기쁨을 느끼는 일!’
전생에는 이런 마음의 여유 따위는 누려본 적 없었다.
늘 뭔가에 쫓기듯 살았고, 시간 대비 효율을 따졌으니까.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딴 사람의 몸에 빙의된 지금에서야 나는 비로소 나 자신으로 사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