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서 버려지는 게 왜 내 탓이야? 날 여기다 보내놓고 일을 벌이는 네놈들 탓이지! 망할 놈들.’원작의 에디트는 이런 세뇌를 사는 내내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내가 전생의 부모님에게 그나마 감사하는 건 그분들이 차라리 나에게 무관심했다는 거다.
날 붙들고 네가 오빠를 건사해야 하네, 집에도 보탬이 되어야 하네, 그러지 않는다면 너는 은혜도 모르는 인간이네, 세뇌했다면 나는 훨씬 더 비참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에디트에 빙의한 뒤에도 리겔호프 백작에게 휘둘리며 살았겠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나는 편지를 들고 벽난로에 다가가 부지깽이로 잿더미를 훑었다.
아직 불씨가 남아 있기에 그 위로 편지를 대어 땔감으로나 써버렸다.
‘차라리 땔감으로 쓰이는 편이 더 나을 편지였어.’
편지가 완전히 탄 것을 확인한 것도 모자라 부지깽이로 여러 번 두드려 완전히 재로 만든 나는 길게 하품하며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저택의 창문 쪽 방비를 좀 더 강화해야겠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의심받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다음 날, 리겔호프가에서 온 편지 때문에도 그다지 기분 좋지 않은 와중에 반갑지 않은 손님까지 루드윅 공작가를 방문하겠다고 알려왔다.
“싱클레어 백작가에서 이번 주 금요일에 방문하겠다고 하더군요.”
소식을 전해주는 킬리언도 불쾌한 듯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싱클레어 백작가가 왜요?”
“아버지를 뵙고 내년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던데, 아마 철광석 유통권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또 모르죠. 리제가 건국제에서 주목을 받았으니 그 때문일지도.”
하긴, 원작에서도 이랬던 것 같다.
건국제에서 공작가의 보물을 목에 걸고 클리프의 파트너로 참석한 리제는 카트린의 지원 사격에 힘입어 사교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다.
그리고 싱클레어 백작은 잘 팔아치웠다고 생각한 리제의 가치가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컸다는 것을 깨닫고는 은근히 친권을 주장하기 위해 루드윅 공작에게 접근했다.
‘물론 어림도 없는 소리였지만.’
리제를 3천만 세나의 빚 대신 루드윅 공작가에 넘길 때 이미 리제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사인한 싱클레어 백작이다.
루드윅 공작이 만만한 사람도 아닌데 ‘부모 자식 사이는 천륜’ 운운하는 소리에 넘어갈 리 없다.
“리제는 어쩌고 있어요?”
지난번 방문 때도 리제는 제 방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건국제에서 그들과 마주친 다음이라 더 두려워하고 있을 터였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괜찮을 리 있나요. 안색이 별로 안 좋더군요. 지금 클리프가 곁에서 달래주고 있습니다.”
원작에서는 킬리언도 리제의 지킴이가 되어 싱클레어 백작가의 개소리를 막아줬던 것 같은데, 지금의 킬리언은 리제가 아닌 내 곁에 있다.
원작과는 달라진 이 현실이 다행스럽긴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 같다는 생각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막판까지 킬리언의 호감을 깎아 먹지 말아야 할 텐데.’
나는 다가오는 겨울을 지나 내년 봄을 맞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각하.”
루드윅 공작가를 찾은 싱클레어 백작이 루드윅 공작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갈색 머리칼에 마른 체형의 남자는 나이보다 젊어 뵈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딘가 비굴해 보였다.
‘암만 봐도 리제의 친부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