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사랑하는 리제를 두고도 리겔호프 백작가와의 혼담을 받아들인 킬리언이야. 고작 나 정도는 손쉽게 레일라 싱클레어로 대체될지도 몰라.’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킬리언은 나를 찬찬히 살피다가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나는 영지전이 끝나고 수도 상황만 안정되면 곧바로 라이젠으로 내려갈까 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야 찬성이죠. 안 그래도 수도에 있으면 구설수에나 시달릴 테고…….”
“별거 없는 영지라 내려가면 좀 지루할지 모르지만, 당분간은 요양하는 셈 치십시오.”
나야말로 영지에 가는 걸 기대하고 있는데, 킬리언은 내가 가기 싫은 걸 어쩔 수 없이 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것 가지고 티격태격하기도 그래서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킬리언과 영지로 내려가는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 *
“리겔호프 백작가가 급하게 일을 벌였구나. 귀찮긴 하지만 차라리 잘되었다. 이번에 아주 뿌리를 뽑아야지.”
보좌관이 건넨 현재 상황 보고서를 훑으며 루드윅 공작이 말했다.
집무실서 함께 둘러앉은 클리프와 킬리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영지전 선포로 당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예상보다 조금 이른 도발이기는 했지만, 리겔호프 백작이 건국제에서 보였던 행동을 떠올려 보면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황제 폐하께서 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클리프의 질문에 루드윅 공작이 피식 웃었다.
“왜 아니겠느냐. 끝 간 데를 모르고 기어오르는 랭스턴 대공이나, 황제 폐하를 단 한 번도 황제로 대우해 주지 않았던 태황태후 폐하나 이번 기회에 쳐 내실 것 같더구나.”
“드디어!”
킬리언이 속 시원하다는 듯 답했다.
“오래 참으셨지요. 솔직히 옆에서 보는 사람이 속이 터질 정도로 말입니다.”
“폐하께서도 이런 날을 기다리셨겠지. 여태 숙청할 명분이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클리프가 이번에는 목소리를 조금 낮춰 물었다.
“살생부 작성은 다 끝났답니까?”
반역에 연루된 가문들을 추리고 처벌 수위를 정했는지 묻는 것이었다.
“대충 끝난 것 같다. 랭스턴 대공가와 리겔호프 백작가, 아일렛 백작가는 멸문을 피하지 못할 게다.”
‘리겔호프 백작가’가 언급됨과 동시에 루드윅 공작과 클리프의 시선이 킬리언에게로 향했다.
“에디트한테서는…… 이상한 낌새가 없느냐?”
공작의 질문에 킬리언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구겨졌다.
“에디트는 이미 리겔호프가와 연이 끊겼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인질로 맡겨둔 딸의 안위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 일언반구조차 없이 선전포고한 거니까요.”
“그 아이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다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루드윅 공작은 킬리언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답답하긴 했지만 킬리언도 뭐라고 더 말할 수 없었다.
‘이번 영지전이 끝나면 최대한 빨리 라이젠에 내려가야겠어. 리겔호프 백작가가 멸문당하면 에디트에게 또 얼마나 막말들이 쏟아질지…….’
킬리언은 더 이상 상처와 아픔을 감내하는 에디트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라이젠에서 몇 년 동안 얌전히, 성실히 살다 보면 사람들도 에디트의 과거나 리겔호프라는 성을 잊어줄 것이다.
사람들의 호기심은 단번에 확 끓어오르지만, 그만큼 식기도 빨리 식으니까.
“일주일 뒤에 떠나겠다. 클리프 너는 기사단 쪽을, 킬리언 너는 무기 쪽을 맡아 일주일 뒤에 차질없이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