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의 가면에 자네가 속고 있는 거야! 아까 나더러 뭐랬는지 아나?”
그러자 클리프가 리제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리제. 이 사람에게 뭐라고 했어?”
“아랫도리 멋대로 휘둘러 낳기만 하면 다 아비냐고 했어요. 루드윅 공작가가 아니더라도 난 이런 인간, 아비로 인정 못 한다고.”
한층 격화된 표현에도 클리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리제는 지극히 맞는 말만 한 것 같은데 뭐가 문제죠?”
싱클레어 백작은 콧김만 쉭쉭 내뿜다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럼 싱클레어라는 성도 쓰지 말아야지!”
“아,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드디어 신전에서 성을 버리는 걸 허락했거든요.”
리제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녀가 여태 싱클레어라는 성을 쓴 것은 신전에서 가문과 그녀의 절연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관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계약서는 있지만 종교는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그러나 종교도 현실에서 발을 떼지는 못하는 법.
제국 최고의 권력과 가까워진 루드윅 공작가의 압박을 신전에서 버티기는 어려웠고, 드디어 리제는 싱클레어라는 성과 헤어질 수 있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싱클레어 백작님.”
리제는 예의 그 천사 같은 미소를 생긋 지어 보이며 클리프의 팔짱을 끼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 *
그리고 같은 시각, 레일라는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걷고 있던 에디트와 마주쳤다.
공작과 킬리언은 리제에게로 뛰어간 싱클레어 백작과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간 클리프 쪽으로는 그다지 관심도 쏟지 않았다.
덕분에 레일라도 조금 대범해졌다. 사실 그녀도 그동안 꿈꿨던 계획이 와르르 무너진 상태라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살아남은 자’ 아니에요?”
“아, 싱클레어 영애군요.”
그제야 킬리언이 이쪽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왔지만, 에디트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대단한 정신력이네요. 피붙이가 다 죽고 혼자 살아남았는데도 죄책감이랄지 두려움이랄 게 전혀 엿보이질 않아요. 원래 좀 뻔뻔하긴 하셨지만…….”
대놓고 시비를 거는 레일라를 보면서도 에디트는 그저 피식피식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내 유효기간이 끝나서 이제 내 자리 차지하러 오신 건가 했는데, 그런 말씀은 없네요? 실패했죠?”
고개까지 비스듬하게 기울인 에디트는 더없이 즐겁고 오만해 보였다.
레일라가 이를 앙다물고 바들바들 떠는데 에디트는 만면에 피우던 미소를 삽시간에 지우고는 말했다.
“내 남편 우습게 보지 말랬잖아. 만만한 사람 아니라고.”
그러더니 천천히 레일라 앞으로 걸어가 집게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 남편, 눈 높아. 이 정도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
말이 끝나자마자 손가락을 옆으로 휙 밀어버린 탓에 레일라의 고개도 그쪽으로 맥없이 돌아갔다가 재빨리 원위치로 돌아왔다.
“이, 이런 무례한……!”
“‘무례’라는 건 일개 백작 영애가 라이젠 백작 부인인 나한테 이러는 걸 지칭하는 거고.”
전보다 한층 막 나가는 에디트의 발언에도 레일라는 이만 갈 뿐, 뭐라고 대꾸할 수 없었다.
전에는 그저 심드렁하기만 하던 에디트가, 지금은 등 뒤에 칼을 숨긴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선을 넘으면 그대로 제 심장에 칼을 꽂을 것 같아서, 레일라는 결국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얼른 아버지 모시고 돌아가 보는 게 좋겠네요. 저러다 공작 각하의 화를 사면…… 그땐 답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