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아가씨…….”
동요하는 법이 없는 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부른 뒤 한참이나 있다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까?”
누구나 답답하게 생각할 법하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리겔호프가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조금도 말할 수 없는 개떡 같은 제약에 걸려 있는 것만 아니었으면, 나도 못 참고 누군가에게 일러바쳤을 거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또 이해할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럴듯한 변명이 필요하겠지.
“그걸 어떻게 말해?”
뒤돌아보니 안나가 미간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안나의 표정이 저렇게 드라마틱하게 변한 건 처음 본다.
그리고 그 한마디로도 안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더 묻지 않았다.
눈치 빠른 하녀의 모범이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약을 발라 드리겠습니다.”
나는 침대에 엎드려 안나의 손에 몸을 맡겼다.
‘소피아를 치운 건 좋은데…… 이게 앞으로 어떤 후폭풍을 불러올지 두렵네.’
소피아가 저지를 에피소드가 좀 더 남았는데 그 부분이 어떻게 변형되어 날 공격할지 두려웠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이 아까부터 내 속을 만족스럽게 긁어주고 있었다.
‘킬리언이 날 위해 소피아를 내쳐준 거야. 내가 직접 못 한다는 걸 알고…….’
그는 리겔호프가 내의 내 처지를 눈치챘을 것이다.
하녀에게 두들겨 맞은 나, 그런 내 안위를 걱정하기보다는 소피아를 멀쩡히 돌려보내 달라고 마차까지 보낸 리겔호프 백작가…….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간다면 모를 수가 없다. 안나조차도 이미 눈치챈 것 같으니까.
하지만 킬리언은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는 나를 내치는 대신 소피아를 내쳤다.
‘희망을 가져도 되는 부분이지, 이거?’
물론 킬리언이 날 내쫓으리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소피아보다는 내가 주연급에 가까운 인물이고, 소피아의 서사보다는 내 서사의 비중이 크니까.
앞으로 내가 저질러야 할 일들이 많이 남은 상황이니, 이야기의 큰 흐름이 벌써 나를 배제할 리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킬리언이 내 사정을 무시하지 않고 조치를 취해줬다는 게 나로서는 크게 위안이 되었다.
‘이럴 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보면 이럴 때 풀어져서 일을 망친다고.’
킬리언이 나에게 어느 정도로 동정심을 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나를 ‘불리할 때는 몸으로 유혹해 무마하려는 여자’로 보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절대 킬리언한테 질척대지 않고 깔끔하게 거리를 둬야 해.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내가 절대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걸.’
그럼 나에 대한 혐오가 줄어들 테고, 내 사정에 대해 알기까지 했으니 리겔호프가 사람들의 목을 칠 때 나 하나쯤은 봐줄지도 모른다.
‘좋았어! 힘내자!’
히죽히죽 웃느라 몸을 살짝 들썩였더니 내가 우는 줄 알고 안나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어 토닥토닥해 준다.
뭐, 이것도 나쁘지 않아.
* * *
원작자.
그는 스스로를 K라 칭했다.
자신의 원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린 탓이었지만 K는 그 사실을 괘념치 않았다.
K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계였다.
자신이 만들어낸, 완벽한 리제 싱클레어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