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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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이라도 괜찮은데 그렇게 말하면 너무 밝히는 것처럼 보이겠지? 죽을 뻔했던 사람이 눈 뜨자마자 끈적해지는 건 좀…… 그렇잖아?

나는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킬리언도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슬그머니 내 쪽으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왔다.

“지금은 모를 테지만, 일어나 보면 아마 온몸이 쑤실 겁니다. 넘어지면서 부딪힌 머리에 혹도 났으니 당분간은 조심해야 합니다. 나도 너무 하고 싶지만…….”

“누, 누, 누가 뭐랬나요…….”

“하도 아쉬운 표정이길래 말입니다.”

킬리언이 또 짓궂게 웃었다.

이럴 거면 도발하지를 말든가. 쳇.

* * *

“아아악!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레일라는 제 분을 못 이기고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손에 잡히는 건 다 집어 던졌고, 아침에 꽂아놓은 꽃을 다 으스러트리고, 하녀들에게 손찌검했다.

레일라가 발광할 때마다 하녀들은 눈물 바람으로 데미안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매번 끌려오는 데미안에게도 즐겁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냥 놔두면 하녀들이 자꾸 그만둬서 어쩔 수 없었다.

“또 왜!”

데미안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치자 귀족 영애답지 않게 헝클어진 머리칼을 한 레일라가 그를 돌아보았다.

“에디트, 그년이 뭔가…… 주술 같은 걸 이용하는 것 같아.”

“웬 참신한 헛소리냐?”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운이 좋을 수 있지?”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부터 얘기해 줄래?”

그제야 레일라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사이 하녀들은 난장판이 된 레일라의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에디트 리겔호프가 죽을 뻔한 거, 알고 있어?”

“익사할 뻔한 거?”

“그거 말고. 최근에.”

“아니. 처음 듣는데?”

레일라는 하녀가 건넨 냉차를 꿀꺽꿀꺽 들이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여자한테 미쳐 있던 남자가 에디트를 거의 죽일 뻔했거든.”

레일라는 더 아리송한 표정이 된 데미안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건국제에 다녀온 날 밤, 발신자를 알 수 없는 편지를 받은 것부터 시작해서 루드윅 공작가 사용인들이 대리로 전한 ‘에디트 죽이기’ 계획까지.

“이번엔 정말로 죽을 뻔했는데, 세상에…… 또 킬리언이 나타나서 구해줬대. 말이 돼?”

허탈한 웃음까지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레일라를 보며 데미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결국, 네게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는 정확히 모른다는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

“당연히 중요하지, 이 바보야! 함정이면 어쩔 뻔했어!”

데미안은 레일라를 따끔하게 혼냈다.

진짜 에디트를 향한 계획이었으니 망정이지, 레일라를 떠보기 위한 함정이었다면 크게 낭패를 볼 뻔했으니까.

하지만 레일라는 오라비의 충고 따위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쨌든 그쪽 말대로 됐잖아. 그리고 내가 뭐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야. 시실리 자작가 티 파티에 참석해서 그 지질한 남자 옆에서 몇 마디 흘린 게 전부라고.”

“무슨 말을 흘리라고 했다고?”

“에디트가 이틀 뒤 정오 즈음에 르벨마리 거리의 <밀레인 서점>에 들를 거라는 말.”

데미안은 레일라가 설명한 상황을 찬찬히 되짚어 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 프레드 시실리는 어떻게 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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