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참아라, 킬리언. 거의 다 됐어!’
나는 슬쩍 주변을 훑고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다시 킬리언의 팔짱을 꼈다.
리겔호프 백작은 입까지 쩍 벌린 채 굳어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제 입을 부채로 가린 채 옆 사람과 쑥덕거렸으며, 또 어떤 아가씨들은 창백하게 질렸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킬리언도 클리프만큼이나 인기 있는 남자였으니, 나와 킬리언의 금실 좋은 모습에 킬리언의 ‘이혼 후’를 노리던 아가씨들이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레일라 싱클레어는 왜 날 꼬나보고 난리지?’
이상한 일이었다.
리제가 클리프의 팔짱을 끼고 있는 것보다 내가 킬리언의 팔짱을 끼고 있는 게 더 놀랍다는 투였다.
‘하긴, 싱클레어 백작가는 리겔호프 백작가와도 사이가 안 좋으니 내가 아니꼽기도 하겠네.’
어쩌면 리제의 자수 실에 독을 바른 사건의 주인공이 싱클레어 백작가였을 수도 있으니까, 범인으로 몰려 난처해져야 했을 내가 멀쩡한 게 의아했는지도 모른다.
‘킬리언과의 불화설을 잠재우는 동시에 얄미운 여럿을 엿 먹일 수 있다니. 이런 게 일석이조, 아니, 일석다조!’
늘 뒤통수를 맞기만 했던 전생을 떠올려 보자면 지금의 나는 정말 얼마나 발전했는지!
충격과 공포에 빠진 이들을 뒤에 남기며 우리는 루드윅 공작 부부를 따라다녔다.
“루드윅 공작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인도 오랜만이에요!”
우리는 금세 루드윅 공작 부부에게 인사하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부인의 드레스가 멀리서도 눈에 띄더라고요. 너무 잘 어울리세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는 겁이 많아서 좀처럼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하지 못하겠던데, 부인은 어떻게 이렇게 과감한 스타일에 도전하셨어요? 대단하세요.”
“제가 장담해요! 조만간 부인의 드레스는 사교계에 유행하는 스타일이 될 거예요.”
다행히 공작 부인의 드레스에 대해서는 호평이 쏟아졌다.
하긴, 공작 부인이니 그녀가 뭘 입었든 칭찬을 쏟아내겠지만.
“저도 겁이 많긴 마찬가지예요. 이건 우리 며느리, 에디트가 골라준 거랍니다.”
공작 부인은 내 얘기를 꺼내며 나를 돌아보고는 내 쪽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 나는 킬리언이 내 몸을 앞으로 떠미는 바람에 그녀를 향해 다가가게 되었다.
“아직 인사 못 하신 분들 계시죠? 여기는 우리 둘째 킬리언과 결혼한 내 며느리, 에디트예요. 에디트, 인사하렴. 이쪽은 에텔만 백작 부인, 이쪽은 크라우스 자작 부인이란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디트 루드윅입니다.”
나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나이 지긋한 부인들에게 인사했다.
“어, 어머! 호호호! 안녕하세요? 세실 에텔만이랍니다.”
“저는 라리사 크라우스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내 인사에 능숙히 반응했다.
나와 킬리언의 불화설은 공작 부인이 더 잘 진화해 줄 것 같다는 생각도 좀 들었다.
그 상태로 열몇 명의 부인들에게 계속 인사한 나는 홀 내에 춤곡이 울릴 때쯤 겨우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날 그 자리에서 빼낸 킬리언은 내 허리에 손을 얹으며 나에게 바싹 붙어 섰다.
그때쯤에 나는 이미 이 무도회란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젊은 남녀들의 연애 현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나이 든 귀족들이 훨씬 많은 데다 한 사람, 한 사람 소개받는 게 얼마나 긴 시간을 잡아먹던지!
이름만 말해줘도 까먹을 판인데 내가 왜 그 사람이 누구의 사촌이며 어느 영지의 주인인지까지 알아야 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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