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넌 보기에는 내가 부모님과 가문의 은혜도 모르고 손바닥 뒤집듯 배신하는 인간 같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가문에 등 돌릴 용기를 지니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용기가 없어서 도구 취급받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건 잘못된 일입니다.”
만약에 내가 킬리언을 먼저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리넌을 좋아했을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은근히 다정한 말을 건네는 성실한 남자라니, 남주와 서브 남주에 비해 임팩트는 좀 떨어지지만 결혼하고 같이 살기에는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
“……리넌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 평가는 또 처음이군요.”
“그건 다른 사람들이 리넌의 진면목을 몰라서 그래요. 정말 괜찮은 아가씨와 인연을 맺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넌은 민망한 기색도 없이 무심하게 인사했다.
나는 다시 라이젠 영지의 서류를 정리하며 킬리언과 내가 함께 라이젠을 꾸려가는 상상에 푹 빠졌다.
너무나 가슴 뛰는 상상이라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비어져 나왔다.
* * *
영지전이 벌어지고 있는 트리치아는 루드윅가의 영지인 라베나와 리겔호프가의 영지인 피사로 사이에 낀 지역이었다.
리겔호프가에 붙은 죄로 제 영지를 전쟁터로 내주게 된 트리치아의 영주는 피가 바싹바싹 마르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전세는 초반부터 루드윅가로 기울어 있었다.
“이번에는 로세토 산 뒤쪽에서 철갑 기마대와 보병사단이 나타나 우리 병력의 옆을 치는 바람에 크게 패했습니다.”
“루드윅 공작은 전법에 관한 한 제국 최강일 겁니다.”
“클리프 루드윅과 킬리언 루드윅은 제 아비를 뛰어넘는 기사들이었습니다. 한 번도 전쟁을 치러보지 않았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범합니다.”
절망적인 보고가 연이어 올라오자 리겔호프 백작가의 진영에는 암울한 기운이 떠돌았다.
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리겔호프 백작의 머리칼이 흐트러져 그의 찡그린 미간 사이로 몇 가닥을 드리웠다.
“망할 놈들. 이제까지 우릴 철저하게 속여왔어! 이따위가 우방을 대하는 태도란 말이냐!”
리겔호프 백작은 저 역시 루드윅 공작가를 속여왔으면서 루드윅 공작가가 자신들의 화력을 숨겨왔다는 사실에 대해 분통을 터트렸다.
영지전을 벌이기 전에 루드윅 공작가의 현 상태를 충분히 파악했다고 자만한 자신을 탓해야 할 일인데도 말이다.
놀라기는 셰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지 운이 좋아 공작 후계가 된 클리프를 늘 못마땅하게 여겨왔고, 저나 클리프나 다를 것은 하나도 없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영지전에서 마주친 클리프는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야녹 왕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대 루드윅 공작을 빼닮았다는 소문이 허언이 아닌 듯했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날이 갈수록 자신과 클리프의 격차를 깨닫는 건 전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심지어 클리프의 동생 킬리언까지 셰인보다 훨씬 우월했다.
특히 얼마 전의 전투에서는 셰인의 앞을 지키고 있던 병력이 킬리언의 말발굽 아래 다 무너지기도 했다.
“이런 게 에디트의 오라비라고? 믿기지 않는군.”
코앞까지 들이닥쳤던 킬리언의 경멸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악몽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건방진 놈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들을 무릎 꿇려주마!’
셰인은 리겔호프 백작과 함께 이를 박박 갈았다.
그리고 그때 마침 소피아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에디트 아가씨는 끝까지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아무래도 신원 미상의 그 조력자를 믿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