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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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못해도 한 달 동안은 조심하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편안하게 생각하시고 몸을 맡겨주세요.”

안나가 능숙한 손길로 내 옷을 걷어가며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무적인 목소리 속에 숨겨진 진심을 안다.

모두가 나에 대해 나쁜 말을 하거나 모르겠다, 못 봤다는 말로 일관할 때, 안나는 고된 심문을 견디며 나를 두둔해 주었으니까.

‘라이젠에 가면 몇 년간은 내 측근 하녀로 두다가 하녀장으로 승진시켜야지.’

아직 나이가 어린 편이니 벌써 하녀장을 맡기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일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르니 안나가 하녀장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날 닦아주고 나면 안나는 곧바로 내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갔다. 원래 11시에서 12시쯤에 아침 겸 점심을 먹는 게 보통인데도 킬리언이 우겨서 가볍게 수프를 먹는 아침 식사를 끼워 넣은 것이다.

물론 그 수프도 말이 ‘가볍게’지, 킬리언이 여기저기 수소문해 구한 귀한 재료를 넣은 것일 때가 많았다.

“오늘은 버섯과 소고기를 다져 넣은 수프입니다.”

안나의 얘기만 들으면 전생에 가끔 해 먹던 ‘X뚜기 수프’처럼 들리지만, 여기에 들어간 소고기는 유명 산지의 특급 소고기이고 버섯은 소고기보다 더 비싼 버섯일 게 분명했다.

“잘 먹을게.”

안나가 떠먹여 주려는 것을 겨우 말려 내가 한 숟갈씩 뜨고 있으면, 킬리언은 그제야 욕실로 가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킬리언이 그날 하루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하는 동안에는 안나가 내 곁을 지켰고, 킬리언이 돌아와 내 곁에 딱 붙어 있으면 그제야 안나가 다른 일들을 하는 식의 철통 보안…… 같은 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돌아와 나와 점심 식사를 같이 하게 된 킬리언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냥……?”

한참이나 더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짓던 킬리언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내가 사람 보는 눈도 없고, 객관화도 안 되는 인간이었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동안 어떻게 리제를 천사 같다고만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아버지와 형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인 줄 알았습니다. 어린애도 아니고, 참…….”

그거야 너는 원작의 흐름을 따라가야 했으니까…….

그렇다고 이런 얘길 킬리언에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 그저 웃고 말았다.

“또 왜 그래요?”

“리제는 여전히 그날의 일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증인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그리고 어머니와 클리프는 그런 리제를 불쌍해하고 있고요.”

다시 보니 킬리언은 꽤 화가 난 것 같았다. 내 앞이라고 일부러 성질을 죽이느라 표정이 복잡해 보였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리제에게 거리를 두고 있지만, 모든 사정을 다 알지 못하는 어머니를 클리프가 구슬린 것 같습니다. 저더러…… 리제를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되겠냐고 묻더군요. 그건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고 화를 냈더니, 당신에게…… 한 번 물어봐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리프는 둘째치고라도, 루드윅 공작 부인의 마음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나에게 아무리 미안하다고는 해도 나와의 인연은 고작 1년뿐이었고, 리제는 지난 6년간 그녀의 딸처럼 지내왔다.

원작의 리제를 떠올려 보자면 내가 이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너무나 착하고 밝고 힘이 되는 존재였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부인은 처형장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과거 일들의 진실을 다 알지 못하니, 리제가 뭔가에 씐 듯 이상한 짓을 좀 저질렀다고 해도, 리제를 집안에서 내칠 만큼 미워할 수 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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