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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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속은 여린 사람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황녀 전하께서 루드윅가 사람에게 이러시면 안 되지요. 안 그렇습니까?”

킬리언이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자 카트린도 점점 부아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킬리언의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는지 어금니만 꾹 다물고 있다가 정말 내키지 않는 투로 말했다.

“그래, 내가 미안하게 됐어. 에디트 양도 내 무례를 용서해 주길 바라네.”

아이고, 내 주제에 황녀의 사과를 받아버리다니, 이게 무슨 봉변이야!

“저,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 제 예전 행실이 그다지 현명하지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전하께서 오해하실 만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 때문에 킬리언까지 덩달아 이런저런 소릴 듣는 터라…… 이이가 좀 예민해졌나 봐요. 죄송합니다.”

나는 이 상황이 좋게 마무리되기를 바라며 최대한 몸을 낮추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예, 전하.”

“그렇게나 킬리언을 생각한다면 자네 아버지나 좀 말려보지 그래?”

“전하……!”

킬리언이 다시 버럭 소리 지르려는 순간 나는 큰맘 먹고 제약에 아슬아슬하게 걸릴 만한 소릴 내뱉어 보았다.

“제 나름대로 설득해 보았습니다만…….”

오! 이 정도는 제약에 걸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 대답에, 빈정대는 것 같던 카트린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정말 리겔호프 백작이 랭스턴 대공 쪽으로 붙는 걸 말려봤다고? 내 말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

그러나 이 질문에 ‘예’라는 대답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질문이 구체적이라 제약이 발동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적극적인 행동 없이도 상대방에게 내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나는 리겔호프 백작 쪽을 흘끗 보다가 카트린에게 시선을 돌리며 서글프게 미소 지었다.

눈은 기운이 다 빠진 것처럼 내리뜨고, 입꼬리는 억지로 끌어올리는 표정 말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킬리언이 뭔가 충격받은 표정이 되었다.

“리겔호프가에서 그 망할 하녀를 보낸 이유가, 설마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드디어, 킬리언이 내 속사정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게 된 모양이다.

내 입으로 내 진실을 직접 말하지 않고도 여기까지 해낸 나 자신이 자랑스러울 지경이었다.

너무 신났지만 나는 끝까지 표정 관리를 하며 눈을 내리깔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건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습니다. 제 아내가 리겔호프가와는 완전히 별개라는 것만큼은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킬리언의 단호한 태도에 카트린도 나에 대한 오해를 좀 푼 것 같았다.

“그, 그래? 정말로 내가 오해했던 모양이네.”

카트린은 황녀답지 않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으음…… 미안해. 비겁한 수를 써서 밀어붙인 결혼에 킬리언이 목줄 매여 산다고 생각했고, 리제도 괴롭힘당한다고 여겼거든.”

“아, 하하.”

원작이었다면 그랬겠지요.

그리고 그랬다면 원작의 에디트는 건국제에 올 수 있었다 하더라도 연회를 즐기다 돌아가지는 못했을 게 뻔하다. 카트린이 말로 아주 잘근잘근 다져놓았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원작의 에디트와는 다르게 친정을 도울 생각도, 리제를 질투할 생각도 없는 사람이었고, 다혈질인 카트린은 빠르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이런 시원한 성격 때문에 카트린이 악역이 아닌 리제의 친구 포지션이 될 수 있었던 거겠지.

“상처 주는 말을 해서 미안해. 킬리언에게도 미안하고. 리제까지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

18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