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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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정말 당신은 가끔 생각지도 못한 얘길 해서 날 웃긴다니까…….”

“그런가요? 하지만…….”

갑자기 킬리언이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의외로 곤란한 상황에 빠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 어떻게……?”

“푸흡! 으흠! 그걸 그렇게 놀라워할 줄은 몰랐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상황에서 단번에 욕구를 꺼트릴 방법이 있기는 하니까.”

애국가냐? 애국가지? 아, 그런데 이 나라에 애국가가 있던가?

난 그딴 것을 궁금해하고 있는데 킬리언은 위협하듯 내 귓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이따 집에 가서 마저 할 거니까 긴장 풀지는 마시고요.”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발코니에 나올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였지?

아! 리겔호프 백작!

……내가 왜 그 꼴뚜기 면상 때문에 심각해졌었지? 전혀 기억이 안 나네.

* * *

킬리언은 아직도 달뜬 기색이 남은 숨을 내쉬는 에디트를 품에 꼭 안으며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기분 좋게 휜 입꼬리는 도무지 내려올 줄을 몰랐다.

‘엉큼하고, 엉뚱하고, 귀엽고…….’

에디트에 대해 이런 감상을 갖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춤추는 동안 팔뚝이며 가슴을 만지작거릴 때만 해도 귀여운 도발이라고만 여겼는데, 설마하니 직접적으로 흥분했다는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그때는 킬리언도 리겔호프 백작 따위는 잊고 에디트에게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황궁만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에디트를 잡아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궁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벌일 수는 없었기에 그는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 울려 퍼지던 장송곡을 떠올리며 간신히 정염을 꺼트렸다.

“조금 진정되셨습니까?”

“네에…….”

들썩이던 에디트의 어깨가 차분히 가라앉자 그녀의 체온이 떨어질 것이 걱정된 킬리언은 자신의 코트를 벗어 그녀에게 걸쳐 주었다.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서면 리겔호프 백작이 또 주변을 맴돌지도 모릅니다.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하지만 아버지와 따로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제 옆에 있어주실래요?”

“기꺼이.”

킬리언은 리겔호프 백작 앞에서 굳던 에디트의 반응이 계속 신경 쓰였다.

아까는 흥분했다는 핑계로 넘어갔지만, 에디트에게는 분명 말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과거가 있을 터였다.

에디트의 등이 온갖 멍으로 얼룩질 만큼 폭행한 하녀를 에디트보다 더 챙기던 집안 아닌가.

‘에디트는 확실히 리겔호프 백작가와 거리를 두려 하고 있어. 도대체 그 집안에서 왜 에디트를 학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디트가 괴로운 과거를 보낸 것은 유감이었지만, 그 덕분에 그녀가 리겔호프 백작가와의 인연을 끊는다면 기쁠 일이었다.

이 결혼 생활을 길게 이어갈 생각이 없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웬만하면 에디트와 함께 라이젠 영지로 내려가고 싶었으니까.

‘이대로라면 나름 괜찮은 부부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사 의심스럽고 얄밉던 여자인데, 언젠가부터 그 밉살맞은 입술만 보면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 저택을 출발하기 전부터도 에디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리제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도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보다는 리제에게 먼저 허락된 ‘로레인의 빛’ 때문에 에디트가 서운해하는 건 아닌지 살피느라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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