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따뜻한 불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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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1년이 지나고, 1년 동안 쌓아 놓은 것들을 야금야금 파먹으며 보내야 할 겨울이 돌아왔다.

바람이 쌀쌀해질 무렵부터 내가 겨울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올해 영주성의 작은 밭에 고구마를 심었기 때문이다.

토실토실하게 여문 고구마는 잘 건조한 다음 창고에 쌓아 두었다.

“눈이 많이 오는군요.”

아침인데도 어두컴컴한 방의 등잔을 켠 킬리언이 커튼을 걷고 잠시 밖을 내다보다 말했다.

“아버지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니까요. 눈이 ‘조금’ 많이 온다고 했는데, 이건 ‘조금’ 수준이 아니잖습니까.”

이미 하얀 설산으로 변한 필리악 산이 뿌연 눈보라 너머로 희미하게 보였다.

“이런 김에 다들 쉬고 그러는 거죠, 뭐.”

나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서 안나를 불렀다.

안나가 가져다준 세숫물로 얼굴을 닦고, 물수건으로 몸도 대충 닦은 우리는 따뜻하고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성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성에 눈이 들이치는 곳은 없는지, 저장해 둔 식자재가 언 것은 없는지, 난방에 문제는 없는지, 누가 아프거나 고생하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것이다.

“오늘도 다행히 별문제는 없네요.”

“눈이 적당히만 오고 그쳐 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마을 쪽에 폭설로 인한 문제가 생기지 않을지 늘 신경 써야 했지만, 올해 겨울나기용 시설 공사를 꽤 많이 진행했으니 큰 사고는 없을 것 같았다.

“우리, 고구마나 구워 먹어요.”

“그럽시다.”

나는 성 1층의 응접실에 있는 커다란 벽난로 앞에 앉아 불꽃이 한창 타오르는 땔감들 아래쪽 재를 살살 걷어 냈다.

그러고는 말려 둔 고구마를 몇 개 묻어 두었다.

“흐흥. 당신도 이젠 군고구마에 푹 빠진 것 같아요.”

“사실 고구마보다는 당신과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은 겁니다.”

“그런 것치고는 고구마를 너무 맛있게 먹는걸요.”

“……고구마 맛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니까요.”

내가 처음 고구마를 굽기 시작했을 때, 킬리언은 왜 백작 부인이 재를 뒤지냐며 기함했었다.

물론 그 호들갑은 그의 입에 따끈따끈하게 구워진 군고구마를 물려 주니 가라앉았지만.

“고구마 재배법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겁니까? 그것도 전생에 알아 둔 지식입니까?”

“아, 아뇨. 그건…… 루드윅 저택의 도서관에서 농서를 보고 배운 거였어요.”

부지깽이로 고구마 위에 재를 잘 덮어 주던 킬리언이 나를 돌아보았다.

“백작 부인이 될 사람이, 고구마 재배법은 알아서 뭘 하려고 그랬습니까?”

“그게…… 언젠가 야반도주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럼 어디서건 뭔가 재배해서 먹고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그래서 구황작물 위주로 재배법을 알아 놨죠.”

킬리언의 손이 멈췄다.

“야반도주?”

“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는 정말 심각했어요. 리겔호프가는 제가 말려도 뭔가 일을 벌일 분위기였고, 루드윅가에서는 저를 계속 의심했으니까요.”

킬리언의 표정이 또 굳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당신이나 루드윅가를 원망한 건 아니었어요. 그때는 그저, 언젠가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농서를 본 것뿐이라…….”

“당신에겐 미안합니다만, 일이 어떻게 되었든 당신이 야반도주에 성공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네? 왜요?”

18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