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께서도 제게 친절한 대우를 바라지 마십시오. 저와 일하겠다고 하신 걸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
킬리언의 눈빛이 그나마 감정을 담은 거였다는 걸 리넌을 보며 깨달았다.
그는 나를 가늠하듯 쳐다보고는 있었지만 그의 두 눈에는 경멸이나 의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공작 부인이 나를 배려해 가장 ‘기능적으로만 움직이는’ 인간을 소개해 줬구나 싶었다.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건 두 가지예요. 유능함과 공정함. 그것만 지켜준다면 나더러 멍청하다고 욕해도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그럼 인사는 이 정도로 된 것 같으니, 일을 시작해 볼까요?”
리넌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자신의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나도 널따란 책상 위에 영수증을 하나하나 펼쳐가며 연도별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창문은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해가 비치지는 않아 서늘한 리넌의 사무실은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했다.
내가 영수증을 펼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 리넌이 뭔가를 펜으로 끄적거리거나 서류를 넘기는 소리 말고는 집중을 방해하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평온해.’
계속 여러 가지 일에 시달리다 보니 단순 노동에 점철된 조용한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창 집중하고 있는데 뒤에서 리넌이 불렀다.
“아가씨.”
“네! 무슨 일 있나요?”
“오늘의 업무 시간은 끝났습니다. 돌아가 보셔도 좋습니다.”
“어? 벌써 그렇게 됐나요?”
해가 잘 안 드는 곳이라 시간의 흐름을 못 느꼈다.
“이것만 정리하고 돌아갈게요. 잠깐만요.”
사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일하고 싶었지만, 내가 여기 있으면 내 감시역도 맡고 있는 리넌 역시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서둘러 영수증들을 상자에 집어넣고 주변에 떨어트린 게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상자를 리넌에게 주었다.
그는 내가 내미는 것을 잠깐 내려다보고 있더니 이내 받아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리넌이야말로 수고했어요. 그럼 내일 뵐게요.”
리넌과 인사를 하고 나오니 복도가 환했다.
안나가 날 방으로 데려가기 위해 리넌의 사무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로 끌려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원작에서 리넌 필치라는 엑스트라는 읽은 기억이 없어. 그러니 이상한 에피소드에 휘말리지는 않겠지.’
나는 전보다 편안한 기분이 되어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방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나가 나보다 한발 먼저 달려가 ‘침입자’를 확인하고는 안심하라는 듯한 얼굴로 내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왔군요.”
“킬리언?”
사흘 만에 보는 킬리언이었다.
“제 방에는…… 어쩐 일로…….”
“와보면 안 됩니까?”
“아니, 뭐,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어?”
킬리언을 곁눈질하며 방에 들어서던 나는 그가 만지작대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그것을 손으로 쳐서 치웠다.
새로 만든 옷을 입은 목각 인형 둘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킬리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아, 하하! 아니, 이건, 뭐랄까, 그냥 취미! 취민데, 남한테 보여주긴 좀 민망한 실력이라…… 아니, 애초에 왜 남의 방에 무단으로 들어와요? 안나! 저것 좀 치워. 얼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