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얼빠였구나.’
최수나로 28년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내가 얼빠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전생에서는 진정으로 잘생긴 얼굴을 본 적이 없었을 뿐이었나 보다.
‘남자는 인성이나 마음씨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다 나의 위선이었나……!’
킬리언의 황홀한 얼굴을 몇 번이고 곱씹던 나는 발끝에 감각이 거의 없어지고 나서야 엉거주춤 일어나 절뚝대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킬리언의 얼굴에 시각적,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해서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나는 공작 부인의 집무실로 향했다.
“오늘부터는 거기 있는 서류들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우리가 구매해야 할 품목과 수량, 가격을 보기 좋게 정리해서 써주면 된단다. 양이 많아서 아마 며칠 걸릴 텐데, 급한 것은 아니니 천천히 하렴.”
“네, 어머님.”
오늘 내게 주어진 서류는 루드윅 가문에서 구매하려는 무기와 방어구에 관한 것이었다.
‘나한테 경계심을 완전히 풀었나? 이런 서류도 만지게 하다니…….’
무기나 방어구를 사들이는 내역은 무가의 일급 정보쯤 될 것 같은데, 그걸 나한테 정리하라고 준 것을 보면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내 목을 노리던 칼날이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각 무기와 방어구의 장단점을 설명한 서류들을 종류별로 묶어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당장 보이는 것부터 표로 적어놓았다. 표로 적어놓는 편이 나중에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서류 분류와 표 정리에 깊이 몰두했던 모양인지, 누가 내 곁에 다가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리제가 곁에 서서 내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제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생긋 웃었지만 나는 왠지 속이 불편해졌다.
‘또 이러네.’
저번부터 정말 이상한 증상이었다.
리제가 보이는 순간순간의 어떤 모습이, 이상하게도 거슬렸다.
‘혹시…… 에디트라는 캐릭터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 때문인가?’
내가 기억까지 온전한 로판의 인물에게 빙의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나는 지금 이 세계에서 운명처럼 결정된 일들을 바꾸려는 거니까, 원작대로 가려는 힘이 작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원작의 캐릭터 설정에 지면 안 돼. 그러다간 모가지가 날아간다고.’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리제! 언제 왔어요?”
“아, 방금이요…… 그런데…….”
“네?”
리제는 내가 표를 그리고 있는 종이를 가져가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건 뭔가요?”
“표예요. 이렇게 정리해 놓으면 나중에 한눈에 보기 쉽잖아요.”
“이렇게 정리하는 건 처음 봐요.”
“어…… 정말요……?”
설마, ‘표’라는 게 없는 세계인가?
실제 역사상으로는 아주 옛날부터 표가 존재했지만, 작가가 일부러 표가 없는 세계라고 설정했을 수도 있다.
얼핏 보기에도 서술형으로 풀어서 정리한 서류가 더 고급스러워 보이기는 하니까.
“어, 어쨌든, 이러면 더 보기 편하지 않아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표의 구조를 설명했지만, 설명을 다 듣고도 리제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으음…… 확실히 에디트의 말대로 많은 정보를 한 장에 담을 수 있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좀 어색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