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언이 푹 빠지긴 뭘 푹 빠져? 걔는 그냥 나한테 몸정 정도 느끼는 것뿐이라고!’첫 여자니까, 모든 첫 경험의 상대니까, 모질지 못한 그 성격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뿐이다.
아마 이러는 것도 킬리언 인생 처음일 테니 카트린이 저렇게 오해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쪽팔리는 건 쪽팔리는 거다.
“네? 푹 빠져요?”
레일라의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그쪽을 쳐다봤다가 당황한 듯한 리제와 눈이 마주쳤다.
리제, 제발 모른 척 좀 해줘…….
“왜? 아닌 것 같아? 레일라 양이 나보다 킬리언을 잘 안다고 생각해?”
“그, 그런 게 아니라…….”
“걔 성격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아? 아, 이런, 공작 부인도 계셨군.”
“괜찮습니다. 킬리언 성격이야, 저도 잘 아니까요.”
공작 부인은 도대체 뭘 안다는 걸까.
“공작 부인께서도 알고 계시다니 다행이군. 어쨌든, 걔는 제 아내라고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옆에 끼고 다닐 성격이 아니야. 황녀인 나한테도 싫다는 소릴 밥 먹듯 한다니까?”
카트린은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어가며 말했다.
“그런 인간이, 황녀가 제 아내를 좀 타박했다고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변호했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해?”
레일라의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고소하긴 한데, 지금 이야기 나오는 인물 중 하나가 옆에 버젓이 서 있다는 걸 좀 눈치채 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카트린이 갑자기 이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왜 잠자코 있어, 에디트.”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이거, 왜 이러는 건가요? 사람 민망하게.
“모르는 척하지 말고 얘기 좀 해줘. 자네랑 킬리언이 얼마나 뜨거운 사인지.”
뭘 얘길 해? 뭐가 뜨거운데?
카트린이 날 친근하게 부르기 시작하긴 했는데, 그녀가 내 편인지 아닌지 좀 헷갈린다.
“하, 하하…… 그런 걸 굳이 떠들고 다녀야 할 만큼 자존감이 낮지는 않아서요.”
“뭐? 아하하하하!”
카트린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배꼽을 잡아가며 웃었다.
그 곁에서 리제가 난감한 미소를 지은 채 주변의 눈치를 보고, 레일라가 분노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은 완벽한 불협화음을 자아내는 3중주단처럼 보였다.
“저번부터 생각했는데, 에디트 자네, 정말 마음에 들어. 사람이 말이야, 여자라도 자네처럼 배짱 있고 도도한 맛이 있어야지.”
카트린은 계속 키득거리다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아! 그래서 킬리언이 자네한테 빠진 건가?”
글쎄요. 그건 그 사람 만나면 물어보시고, 지금은 제발 그 푹 빠졌다느니 하는 표현 좀 그만둬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킬리언 군이 그녀에게 빠졌든 안 빠졌든 간에, 리겔호프 백작가와 맞서고 있는 지금은 확실히 선을 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날 공격하려던 레일라가 본전도 못 찾고 물러갈 판이 되자, 드디어 데미안이 등판했다.
“싱클레어 군이군. 그런데 그거 알아? 귀족 가문끼리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은 혼맥을 이어 왔고, 가문끼리 싸우게 되면 여자는 언제나 남편 쪽에 귀속되었어. 그렇게 따지면 에디트는 이미 루드윅 가문 사람이야.”
구식 가족관계가 이렇게 반갑기는 또 처음이네.
하지만 데미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정략결혼 자체가 서로 얻을 게 있을 때 맺는 거였죠. 하지만 루드윅가, 그리고 우리 황제파가 리겔호프 가문에서 더 얻을 게 있습니까? 오히려 더 복잡해지기 전에 치워야 할 대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