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로에서 시작하는 영지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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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언의 사랑을 몸정으로 격하시킨 벌로 나는 며칠 동안이나 그의 뒤끝에 시달려야 했다.

낮에는 무슨 말만 하면 ‘우린 몸정 때문에 사는 사이니까.’라며 짐짓 쓸쓸한 표정을 지었고, 밤에는…….

‘킬리언의 사랑이 몸정 따위가 아니라는 걸 왜 몸으로 확인시키는 거지? 앞뒤가 안 맞잖아!’

나를 몰아붙이는 킬리언의 품 안에서 절정에 이르면서도 그런 생각이나 곱씹고 있었다.

“다른 것으로는 보여 줄 수가 없으니까요. 선물을 사 주려고 해도 죄다 거절하니…….”

내가 장난처럼 던진 말에 킬리언은 또 불만스럽게 대답했다.

킬리언은 자꾸 뭘 사 주지 못해 안달이었지만, 나는 정말이지 더 필요한 게 없었다.

낡은 원룸에서 십 원 단위까지 가계부를 적으며 살던 최수나가 커다란 성의 주인이 되었는데 뭐가 아쉬울까.

“이미 수도에서 내려올 때 이것저것 사 줬잖아요.”

용병들에게 줘 버린 루비 목걸이는 킬리언이 되찾아 온 덕분에 지금도 내 목에 걸려 있었고, 내 보석함에는 내 취향의 보석이 가득했다.

드레스룸 역시 실용적이고 예쁜 드레스로 가득 찼고, 그 외의 액세서리, 화장품, 신발 등도 모자란 게 없었다.

“아니, 그런 건 당연히 필요한 것들이었고요. 뭐…… 오르골이라든가, 유리 인형이라든가, 고급 향초라든가…… 그런 건 싫습니까?”

“그런 걸 얻다 써요?”

“하아…….”

킬리언은 리제가 탐내던 ‘예쁜 쓰레기’들을 아쉬워하는 것 같았지만, 난 그런 데 돈을 쓰느니 그 돈을 아껴 영지 도로를 손보고 싶었다.

‘하지만 우선은 성안 살림부터 손봐야겠지.’

성에 구비된 가재나 비품들을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이미 풍족했다.

내가 맞닥트린 문제는 바로 사용인들과의 위계 문제였다.

오랜 세월 주인 없이 지내던 사용인들은 좋게 말해 개성이 강했고, 나쁘게 말해 건방졌다.

킬리언은 깍듯한 태도로 대하면서 나는 외부인 보듯 한달까.

아마 나에 대한 소문이 안 좋게 난 것 같았다.

‘시골에서는 수도의 소문이 퍼지는 데 한참 걸리니까, 여기서는 아직도 내가 악녀인 줄 알겠지.’

이곳에서의 내 소문이야 안 들어 봐도 뻔했다.

죄 없는 킬리언이 리겔호프가의 계략으로 인해 음탕한 악녀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고, 마음 착한 킬리언은 리겔호프가를 다 척살하면서도 제 아내까지는 죽이지 못해 데려왔다고 하겠지.

아직 킬리언이 얼마나 싹수없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겠지만.

“어쨌든 사용인들의 태도는 조금 문제가 있어. 킬리언이 알게 된다면 큰 사달이 날 거야.”

“아마…… 그렇겠지요.”

안나가 한숨처럼 대답했다.

“이곳 하녀들의 성정은 순박하고 부지런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자존심과 고집이 센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더라. 나한테 인사는 하는데, 표정들이 영 안 좋더라고.”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며 복도를 걷는데 맞은편에서 마침 하녀 둘이 지나갔다.

그들은 시선을 피하며 아주 무성의하게 고개만 꾸벅하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나보다는 안나가 더 안색이 안 좋아졌다.

“제가 따끔하게 혼을 내겠습니다.”

“아니야. 그랬다가는 안나도 하녀들 사이에서 겉돌게 될 거야. 일단은 그냥 놔둬.”

“하지만, 마님.”

“사람 마음은 억지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야.”

사실 나 역시 막막했지만, 그래도 하인들을 매질하거나 벌을 주면서 억지로 위계질서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18Donde viven las historias. Descúbrelo aho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