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조건을 만족시켰다고 그래?’1단계 예외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도 그랬지만, 2단계 예외 조건을 충족시켰다는 이 상황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킬리언과 잠자리를 할 때마다 조건이 충족되는 건가?
‘2단계 예외 조건이 뭔데요?’
이번에도 온 힘을 다해 목소리에게 내 의문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목소리는 기계에 녹음된 답을 들려주듯 말했다.
[2단계 예외 조건 : 킬리언 루드윅의 제안을 열 번 거절한다.]
‘뭐?’
너무도 황당한 조건이었다.
차라리 1단계 예외 조건의 그 악랄함을 납득하기가 더 쉬울 만큼.
충격에서 벗어난 내가 제일 처음 한 생각은, 저 조건을 걸어둔 누군가가 나를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이었다.
‘확실해. 내가 발버둥 치는 걸 실시간으로 구경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어.’
이 세계의 신은 사디스트가 틀림없다!
그는 내가 킬리언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저런 조건을 내건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내가 킬리언의 오해를 풀자고, 그에게 절대 질척대지 말자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나는 절대로 2단계 예외 조건을 넘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로 소 뒷걸음질에 쥐 잡았네.’
아마 지금쯤 이 세계의 신이라는 그 작자는 나만큼이나 황당해하고 있겠지.
그걸 생각하니 조금 고소하기도 했다.
나는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암흑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꿈에 점차 사지의 감각이 돌아왔다.
나른한 몸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나를 강하게 붙들고 있어서 몸이 아무렇게나 무너지지는 않았다.
“무슨 꿈을 꾸길래 자면서 웃습니까?”
낮게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막이 전율할 정도로 야한 킬리언의 목소리였다.
안내 방송용 꿈에서 일반적인 꿈으로 넘어왔나 보다. 내게 속삭이는 킬리언의 목소리라니…….
“흐응…… 좋아…….”
살짝 실눈을 뜨자 흐릿하긴 하지만 남자의 벗은 가슴이 보였다. 아까 킬리언의 목소리가 들린 걸 생각해 보면, 이것도 분명 킬리언의 가슴이겠지.
나는 몽글몽글한 기분으로 거기에 얼굴을 비볐다.
꿈인데도 뜨거운 체온과 단단한 근육의 느낌이 실감 났다. 정말 좋았다는 뜻이다.
‘아…… 이러다 죽어도 여한이 없겠…… 응……?’
한참 킬리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킁카킁카 그의 체취도 들이마시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난 다음에야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종류의 꿈치고는 묘하게 러닝타임이 긴데…….’
어딘지 싸한 기분에, 나는 그제야 눈을 열심히 깜빡이며 잠을 깨보려고 노력했다.
눈앞에는 모로 누워 더욱 깊어진 남자의 가슴골이 있었다.
‘그래, 내가 저기다 얼굴을 비볐지.’
그 깨달음이 있은 지 5초 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 키, 킬리언! 미안해요!”
미친! 꿈이 아니었다! 나는 킬리언의 맨가슴에다가 얼굴을 처박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과했는데, 웃던 그의 얼굴은 오히려 굳었다.
“설마 난 줄 모르고 얼굴을 갖다 비빈 겁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꾸, 꿈인 줄 알았어요!”
“꿈? 그 꿈에서도 상대가 저였던 건 확실합니까?”
“네. 근데…… 현실이라면 당신이 가만히 있을 리 없어서…… 꿈인 줄 알았어요.”
![](https://img.wattpad.com/cover/338727855-288-k808966.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