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36 0 0
                                    


사춘기 여자애들의 감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널을 뛴다.

작은 계기에도 크게 기뻤다가 크게 슬퍼지기도 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작은 계기 따위에 휘둘릴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아, 백혈병이랴! 하이씨, 집구석에 돈도 없구마는 아새끼는 이상한 병에나 걸려쌌고.”

백혈병 판정을 받고 집에 돌아간 날, 아빠는 누군가와 통화하며 짜증을 냈다. 그것도 내 앞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과 어지럼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머리가 아파서 양호실에 갔다가 양호 선생님이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백혈병이라는 걸 알게 됐다.

온몸이 아픈데 엄마와 아빠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한숨만 푹푹 쉬어댈 뿐이었고, 내가 느낄 공포와 불안을 덜어주지는 않았다.

죄인이 된 심정으로 조용히 입원을 하고 투병을 하고 오빠의 골수를 이식받기까지, 나는 내내 우울하고 슬펐다.

솔직히 말해,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오빠의 골수가 나와 맞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기쁘지 않았다.

“아, 싫다고! 그거 존나 아픈 거잖아!”

“그래도 니 동생이잖어. 어쩌것냐.”

“아, 그냥 뒈지라고 해!”

“하아…… 수찬아, 이것만 하면 니가 갖고 싶다던 그 노트북인지 뭔지 사줄 테니까…….”

“……진짜? 진짜지?”

“그려, 그려.”

내가 곁에 있는데도 그냥 뒈지라고 하라던 오빠의 목소리가 오빠를 볼 때마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살아나곤 했다.

게이밍 노트북과 거래된 골수 이식을 마치고 몇 가지 처치가 끝나 기진맥진한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은 골수를 기증한 오빠 곁에서 기특하다, 수고했다 칭찬을 건네고 있었고, 나는 혼자 누워 하얀 천장을 보고 있었다.

너무 슬프고 우울해서 눈물이 주룩 흘렀는데, 그 순간 내가 부모님의 관심을 끌려고 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다 소용없는데, 왜 울어?’

울어봤자 나를 돌아봐 주지 않았다. 질질 짠다고 욕먹지나 않으면 다행이었지.

그걸 깨닫고 난 뒤부터는 우울한 기분이 들어도 그 기분 자체가 쓸데없는 짓 같아서 금방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랬던 전생의 깨달음은 지금도 유용했다.

‘우울해할 때가 아니야. 킬리언이 나한테 마음을 줄지 말지 모르는 상황에서, 킬리언만 믿고 있는 건 위험해.’

그동안 엑스트라들의 환심을 사보려고 인사도 열심히 하고 다녔고 덕분에 날 아는 척해 주는 사용인들도 늘었지만, 좀 더 실질적인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돈! 돈을 더 모아야 해!’

아직도 말렌 중앙은행의 내 금고에는 9백만 세나밖에 없었다.

이 세계의 평민 기준으로는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하는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처분할 수 있는 보석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드레스에서 떼어낸 건 일단 다 팔고, 결혼할 때 가져온 액세서리는…… 음, 내 취향 아닌 건 다 팔자.’

서랍 안과 액세서리 케이스 안을 다 뒤져 팔 것을 추렸지만 생각보다 팔 만한 보석이 많지는 않았다.

드레스를 장식하던 커다란 보석들은 루비나 사파이어 비슷해 보이는 유색 광물이었는데, 보석류이기는 했지만 돈을 많이 받을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안 입는 드레스도 팔자!’

귀족들의 드레스 역시 고가였다.

입던 드레스를 팔면 누가 사기는 할까 싶었는데, 한두 번 입은 드레스를 다시 입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중고 드레스 시장도 활황인 모양이었다.

18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