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언이 내 목을 치도록 설정된 캐릭터라는 걸 왜 자꾸 까먹는 걸까.만날 때마다 ‘예예.’ 하고 납작 엎드려도 모자랄 판에, 킬리언만 만나면 왠지 장난기가 도지는 데다 대꾸할 말이 떠올랐다.
‘이것도 원작의 영향인가? 원작의 에디트도 맨날 킬리언을 들들 볶았잖아. 물론 이거랑 그건 좀 다르긴 하지만.’
내가 대화의 물꼬를 텄는데도 킬리언은 나를 가만히 응시할 뿐, 말이 없었다.
결국 나도 그의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차나 마시며 평소와 같이 아침 시간을 즐겼다.
오늘도 날씨가 좋았다.
봄이 무르익고 있어서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파릇파릇한 연둣빛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싱그러운 봄 향기 가득한 공기가 천천히 내 방을 물들였다.
“날씨 좋다…….”
아침이라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상쾌하게 느껴졌다.
흘러내린 숄을 고쳐 두르려는데 킬리언이 내 등 뒤로 다가와 양팔을 벌린 채 나를 그와 창문 사이에 가두었다.
뜻밖의 상황에 너무 당황스러워서 나는 딱딱하게 굳었다.
“어머니 일은 잘 돕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네? 아, 뭐, 그거야, 당연한…… 일이잖아요.”
“의심스러울 정도로 능숙하다던데…….”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아무래도 어제 일이 킬리언의 귀에 들어가긴 한 것 같은데…….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어머니의 방에서 보고 들은 건 그 방을 나오는 순간 잊으라는 말입니다.”
“걱정 마세요. 그걸 다 기억할 정도로 머리가 좋지는 않거든요.”
“글쎄요. 의외로 머리가 아주 나쁘지도 않은 것 같던데요.”
뭐야? 지금 시비 걸러 왔나?
아니, 아무래도 좋으니까 좀 떨어져서 말해줬으면 좋겠다. 입으로 심장 뱉어낼 것 같으니까.
“아, 그리고…….”
“또 뭔가요?”
“어머니의 단골 의상실은 너무 고상하고 품격 높아서 당신의 취향을 담아내기엔 역부족이던가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원하는 곳이 있으면 따로 말씀하십시오. 불러 드리죠.”
“아니, 그러니까…….”
“같은 드레스는 두 번 입지 않기로 유명한 당신이 새 드레스를 맞추지 않았다니, 시위하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구나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드레스를 새로 맞추지 않았다는 것조차 날 미워할 이유가 된 거야?
딴에는 사치하는 이미지를 벗어나 보겠다고 수작 부린 건데, 결국 원작이랑 결과가 똑같잖아!
‘억울해.’
킬리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자고 다짐했는데도 이상하게 그의 오해와 비난은 참기 힘들었다.
“시위하는…… 방법이라고요?”
킬리언은 대답이 없었다.
“킬리언, 당신은 저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뭘 모른다는 겁니까?”
“의상실이 마음에 안 들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다른 의상실을 불렀지, 왜 드레스 수선을 맡기겠어요? 내가 그런 것 가지고 남의 눈치를 볼 것 같던가요?”
나는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그를 향해 돌아섰다.
아랫도리를 비비기라도 할 것처럼 바싹 붙었던 그가 움찔하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당신이 그냥 나를 미워하는 것뿐이잖아요. 어떻게든 그 원인이 나한테 있다고 끼워 맞추는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