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 내 사과를 당신이 꼭 받아줘야 할 의무는 없어요. 하지만 저더러 ‘사과할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건 제 쪽에서 사과받아야 할 말 같네요.”
“예?”
프레드는 정말로 의아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뭐가 저렇게 이해가 안 되는 거지?
“당신은 늘 남을 내려다보는 도도한 여자였잖아요. 군림하는 소악마였지요. 그런 당신이 사과? 말도 안 돼.”
아…… 프레드.
네 꼴이 오징어 같지 않았더라도 나는 너를 거절했을 거야.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진정한 사랑 운운했다는 뜻이겠네요.”
“뭐라고?”
“프레드. 나는 당신 같은 남자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몰라요. 다들 내 외모와 가문만 보고 달려들었죠. 그 탐심 어린 눈빛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아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머릿속에서 또 목소리가 들렸다.
[에디트 루드윅이 악녀로서 사망하면 이야기가 원래의 궤도를 되찾습니다. 사망까지 앞으로 3분.]
예쓰! 사망까지의 시간이 3분이나 더 연장됐다!
어디까지 연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최대한 버텨봐야 한다.
“처음엔, 당신은 좀 다를 줄 알았어요. 하지만 결국 당신도 다른 남자들과 똑같은 말을 속삭였잖아요. 기억나요?”
“무, 무슨 말을…….”
“‘언제쯤 당신을 내게 줄 겁니까?’라고 했어요. 이 정도 정보를 가져다주고 선물을 갖다 바쳤으면 되지 않았냐는 것처럼…….”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 몸이 목적이었다는 거잖아요. 거기에 ‘사랑’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면 안 되죠.”
프레드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를 자극하는 게 아닐까 싶기는 했지만 그의 기억을 제대로 보정해 줄 필요가 있었다.
저 자신을 가련한 피해자라고만 여기는 저 남자의 왜곡된 기억을 말이다.
“저는 거기에 정말 실망했어요. 그래서 연락을 끊었던 거죠. 혹시 내가 당신을 오해한 게 아니었을까 가끔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오늘 당신이 하는 말을 들으니 오해가 아니었나 보네요.”
프레드는 자기가 정확히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아까의 맹렬한 기세는 한풀 꺾인 상태였다.
“저는,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소악마니 리겔호프의 꽃뱀이니 하는 별명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 그냥, 평범한 여자라고요.”
“그렇다면 남자들에게 왜 그런 겁니까? 마음을 주는 척하면서 남자들을 이용한 뒤 버렸잖습니까!”
“저야말로 남자들에게 시달린 것뿐이에요. 다가올 땐 진정한 내 모습을 사랑한다고 속삭이다가 결국엔 내 몸을 원했잖아요. 그걸 거절했을 뿐이에요!”
“그, 그럴 리가……!”
“결혼한 후에야 저는 제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죠. 올해 제가 참석한 파티는 건국제가 유일해요. 사람들 모이는 곳은 관심 없고 책이나 읽으며 평온하게 살고 있어요. 따분하죠?”
나는 프레드에게 생긋 웃어 보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창문에 먼지가 많이 끼어 있어서 밖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창가로 걸어가 바깥을 보며 생각에 잠긴 척했다.
칼 든 사람을 등 뒤에 둔 채 태연한 척하는 거라서 꽤나 긴장됐다.
“당신이 나랑 함께한다고 해도 반년 안에 질릴 거라고 장담해요. 난 당신의 환상 속에 사는 그 여자가 아니니까.”
“아니야…… 아니야……! 나의 에디트는……!”
“당신이 상상한 에디트는 아마 요부처럼 남자를 유혹하고 발아래 꿇리는 한편, 밤에는 달콤한 속살을 내어주는 여자겠죠?”
프레드의 대답이 없었다. 정곡을 찔렸겠지.
“내가 최근에 읽은 책이 뭔지 알아요? <제국 중북부 맞춤 농서>예요. 해콩과 묵은 콩을 구별하는 챕터를 인상 깊게 읽었죠. 그리고 오늘은 평소 신던 스타킹의 발가락 쪽에 구멍 나서 새 스타킹을 사러 왔을 뿐이고요. 최근엔 변비도 좀 생겼는지 배에 가스도 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