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제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계속 퍼트리던 레일라 역시 사교계에서 개망신을 당하며 매장당한다.그랬던 그들이 갑자기 무슨 생각의 변화인지, 리제를 클리프의 아내로 인정하고 그 대신 킬리언을 노리게 된 것이다.
그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나는 뒤늦게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아! 원작의 에디트는 공격당할 위치도 아니었지, 참! 클리프와 킬리언, 둘 다 리제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리제가 끝까지 공격 대상이 됐던 거야!’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암만 봐도 공작가의 비호를 받는 듯한 리제를 건드리느니, 이래저래 비빌 언덕 없어 보이는 나를 공격하고 킬리언의 옆자리라도 차지하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개연성의 문제겠네.’
그리고 안타깝게도, 싱클레어가가 들이민 조건은 나를 내칠 훌륭한 개연성을 만들고 있었다.
‘내가 공작이었어도 나보다는 레일라 쪽이 낫겠다고 여길 거야.’
리겔호프가에서는 더 이상 얻을 게 없었다.
에디트 리겔호프의 가치는 이미 바닥을 치다가 못해 뚫었다.
‘게다가 리겔호프가가 조만간 일을 벌이면…… 싱클레어가가 내민 제안이 아주 매력적으로 느껴질 거란 말이지.’
뒷골이 당겼다.
‘킬리언에게 목이 안 잘리더라도 이혼당할 수 있다는 소리네.’
뭐 하나 쉽게 가는 게 없다.
이제는 목숨 살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니.
물론 이혼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기는 하다. 건국제에서 말한 대로 내게는 번듯한 저택과 넉넉한 위자료가 지급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크게 심호흡하고는 다시 응접실로 들어갔다.
내가 다가갈 때까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던 킬리언은 내가 자리에 앉자 내 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혼자서는 화장실도 못 간답니까? 하녀나 붙여주고 말지 그랬습니까.”
“……그래도, 손님이시잖아요.”
“하여간에 은근히 착해 빠졌다니까.”
킬리언이 피식 웃으며 타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입매에 걸린 삐딱한 미소가 달콤했다.
그걸 보면서 나는 내가 큰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젠 저택과 돈보다…… 킬리언이 갖고 싶어.’
원칙을 벗어난 악녀 빙의물 생존기는 과연 어디로 흐를 것인가.
‘나도 궁금하다, 정말.’
나는 비어져 나오는 한숨을 막으려고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 * *
건국제 이후로 잠잠하던 리겔호프 백작가는 루드윅 공작가에 기습적으로 영지전을 선포했다.
내 방에 들른 킬리언이 난감한 기색을 띠며 그 소식을 전해주었을 때, 예상한 일이었는데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으, 드디어…….’
내가 두려워하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영지전은 리겔호프 백작가가 제 무덤을 판 거나 다름없는 사건이었다.
고작 해봐야 돈이나 좀 있는 백작가가 어떻게 구국의 영웅이라는 소릴 듣는 무가에 전쟁을 선포할 생각을 했는지…….
‘아마 랭스턴 대공이 가진 기사단을 믿는 모양이지만, 루드윅 공작가 뒤에는 무려 황실이 있다고, 이 바보, 멍청이들아!’
물론 귀족들 사이에 영지전이 벌어지면 황실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동서고금 모든 역사를 뒤져봐라. 완벽한 중립을 지킨 황실이 어디 있나.